진료실을 빼꼼이 안으로 살피면서 들어오시는 한 할머니의 손에는 거무스르한 비닐봉지에 무언가 담겨 있었다. 이 할머니는 읍에서 가까운 시골에 혼자 살고 계시는데, 한 달포전에 하혈이 자주 심해져 내원 하였는데 인근 산부인과를 통해 광주로 보냈더니 대학병원에서 자궁암 말기 판정을 받고 오셨다. 이미 수술시기가 넘어 현재는 시한부 인생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이다. 광주에 딸이 하나 있어 의지 하고는 있으나 딸의 상황도 여의치 않아 다시 내려 오셔서 독거노인으로 요양 중, 거의 날마다 이곳 병원을 들르시고 있다. 아마 병적인 호전 보다는 정신적인 안정감을 느끼시는 모양이다. “할머님 이게 뭐예요? ” 비닐봉지를 받으면서 말을 건넸다. “응. 이거 요앞 장터에 지나치다가 너무 싱싱해서 우리 원장 먹으라고 두 마리 사왔지.” 봉지 안에는 검푸른색의 숭어 두 마리가 넣어져 있었다. 반갑게 받지않으면 서운해 하실까봐, 연신 할머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보내는 할머니의 뒷그림자는 왠지 모를 인생의 쓸쓸함이 감돈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시골의사”이다 보니 거의 모든 시간을 노인분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다. 간혹은 해남노인대학에 건강 강의라도 갈 때는 왠지 모를 신이 나며 강의 후 돌아올 때, 항상 느껴지는 마음은 거꾸로 그분들에게 무엇인가 많이 배우고 온 느낌이다. 아마 인생의 연륜 이라는 거대한 산을 보는 마음 일것이다. 이제는 그 시끌벅적하던 선거가 끝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여도 상관할 사람이 없을 듯 싶다. 얼마전에 한 정치인의 60,70대 폄하 발언으로 나라가 떠들썩 한적이 있다. 전체적 맥락을 볼 때, 정치에 무관심한 20, 30대 젊은 유권자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한 언론사의 요청을 받고 젊은층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말을 하다 빚어진 실수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하고 집에서 쉬셔도 된다”든지, 한걸음 더 나아가 “그분들은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 운운한 것은, 세월이 흐르면 어쩔 수 없이 무대 뒷편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노인들의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을 감정적으로 헤집는 말들 인 것 같다. 과거사를 돌아다 보면,이 나라 노인들은 일제 치하의 나라없는 설움, 세계 제2차대전 때 징용·징병, 한참 젊고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고,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체험하는 등 치욕스런 일들을 겪어온 세대들이다. 이후 오직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머나먼 독일까지 광산의 막장에서 곡괭이를 들었고, 자라나는 후손에게 편안한 삶을 주고자 경제성장 댓가로 베트남전쟁도 다녀왔고 대부분 이제는 “고엽제 중독”이라는 악명높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잘 먹지도 입지도 배우지도 못했으면서도 오직 후손들만은 훌륭하게 키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전후 초토화된 잿더미 속에서 보리고개로 연명하며 피와 땀과 눈물로 국가재건과 발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오늘날 이만큼 잘살게 해놓은 은인세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가 썩든 말든 사리사욕과 당리당략, 이전투구만 일삼는 정치인들, 국회의원 중에는 병역미필, 세금미납, 전과자도 포함되어 있는 서글픈 현실에서,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겠다고 설쳐대는, 앞으로 차기 총리까지 물망에 오르고 있는, 어떤 정치인의 이분들에 대한 모독한 망발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이에 대해 파장이 일자 끝까지 반성하는 기미 없이 표를 의식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고 사퇴했다고 될 일인가? 이런 사람이 국무총리를 한다면 노인정책이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일본위안부 모델 사진 찍어 돈 많이 벌어서 위안부 할머니들 맛있는 것 사주겠다는 철없는 여배우와 무엇이 다를게 있겠는가? 누가 뭐라 해도 이분들은 우리의 정통성이고 우리의 역사요. 시대의 산 증인들이다. 어느 사회든지 간에 역사가 흐지부지되고 정통성이 손상된 사회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갈수록 인터넷 사회니 핵가족이니 하면서 예전의 유교적 사고방식이 개방적 사고로 바뀌고 삼강오륜이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게 현실이다. 노령층이 설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을뿐 아니라 국가나 사회, 가정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질만능주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충효사상도 엷어지고, 갈수록 윤리도덕이 추락하고 있다. 60,70대 노인분들 이야말로 우리나라 국가사회에 공헌해온 한시대의 주역으로서 가정에서나 사회·국가적으로 적극 우대를 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 망발을 한 사람도, 우리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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