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률(교사, 시인)

 
 

한국처럼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또 있을까?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주변을 둘러보면 부족함 없이 사는 사람들이 참 많기도 하다. 결코 그 행복한 삶을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저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한국사회에 대한 일종의 조롱임을 숨기지 않겠다.

한국은 이미 오래 전에 배고픔이 해결된 나라라고 한다. 음식 소비량이 엄청난 나라이기도 하고, 그만큼 음식 쓰레기 처리에 애를 먹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요즘 방송을 보면, 방송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어디 방송만이겠는가, 신문이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든 음식 소개나 음식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 천지다. 그들의 역할이 원래 저런 것이였나? 도대체 왜들 저렇게 먹는 것에 혈안이지?

더 좋은 것이나 더 맛있는 걸 찾아다니는 거야 배부른 자들의 유희라고 치자.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온통 먹고 노는 것만 가득한 신문, 방송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은 온통 '배부른 돼지'들의 나라다.

언론이나 관계망서비스가 이러다 보니 사람들의 대화도 온통 먹는 얘기고, 생각마저 먹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건 아닐까? 혹시 이런 생각들의 합이 우리를 편협한 돼지들의 삶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혹여라도 그런 측면이 있다면 지금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보편적 삶을 향해 얼마나 나아가고 있을까? 지구촌 인구의 30%가 기아에 허덕이고, 50% 정도가 식량 부족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다고 한다. 우리 한국에서도 지금 당장의 한 끼 밥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천정부지 오르는 부동산 가격으로 살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코로나-19로 인해 서민층의 고통은 또 어떤가?

나는 우려한다. 우리의 편협한 생각이 우리 주변을 바라보는 눈을 멀게 하고, 우리의 고통에 대해 함께 아파할 줄 모르는, 오직 나의 욕심에 의해 내 이웃과 친구를 물어뜯는 삶으로 우리를 처박히게 한다면.

나는 우려한다. 너의 고통이 내게 만족을 주고, 나의 고통이 네게 쾌락이 되는 이런 역작용의 관계를. 또 나는 우려한다. '당연한 거 아냐?' 서슴없이 되묻는 사람 앞에서, '혼자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영혼 없는 말들 앞에서, 어쩌면 우리의 가족이거나 친구 앞에서.

"그래도…." 얼버무리는 기죽은 정의를 상대로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 헛소리 말고 정신 차려~"라고 확신에 찬 혐오를 던지는 이 사회의 주류 앞에서 나는 우려하고 또 우려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너 어떻게 살고 싶어?"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조금은 당황스럽고, 막상 이렇다할 대답을 찾기 힘들겠다. "난 말이야…." 얼버무리기 딱 알맞은 질문이기도 하다. 고작 찾은 대답이 "행복하게, 편하게, 즐겁게…." 이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때로 이런 대답을 해놓고 보면 뭔가 개운치 않다. "그니까 어떻게 행복해지고 싶은데?"라는 되물음이 온다면 더 옹색해지고 말 것이다. 구체적인 비전이 떠올라주면 좋겠는데 비전이랄 수 없는 것들이 머리를 채울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여유롭게, 굳이 노동에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 구체적인 답을 찾을수록 구차해지는 나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더 구차해지지 않기 위해 그런 쓸데없는 질문 좀 하지 말라고 역정을 낼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어느 날 혼자일 때만이라도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닐까? 우리가 아직도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아직도 가끔 양심에 흔들리는 자신을 볼 때가 있다면, 괴물로 변한 모습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할 때가 있다면. '이런 게 내 삶이었을까?' 질문해 보아야 한다, 단 한번만이라도.

우리 살아가면서 어쩌다가라도 "힘들지? 나도 힘들긴 해. 그래도 우리 힘내자." 위로를 건네보면 어떨까? 우리가 비록 길들여진 배부른 돼지라 할지라도, 입에 발린 소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한번쯤 배고픈 용기로 '너'에게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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