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성(공연 프로듀서)

 
 

문득, 내가 35년을 끊임없이 연극과 뮤지컬을 만들고 각종 다양한 이벤트를 감독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원천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논두렁, 밭두렁, 바닷바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해남 문내면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폐교돼 우수영초등학교와 통폐합이 됐지만 문내동초등학교와 우수영중학교를 졸업했다. 농사 짓는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의 기쁨과 슬픔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 돌이켜보면 가난했던 시골동네 이곳저곳의 모든 일들이 한 편의 연극 속에서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장면 하나하나였던 것 같다. 고개만 돌리면 주위에서 벌어졌던 웃음과 눈물로 흠뻑 적신 군상들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곳이 바로 나의 고향이다.

내가 대중들에게 작게나마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힘은, 내 고향 해남에서의 소박하지만 소중한 어린 시절이 그 감성의 바탕이 됐고, 그 논두렁, 밭두렁, 호미질, 쟁기질, 그 땀과 눈물이 나에게 지치지 않고 누구보다도 더 깊고 넓은 정서의 작품을 만들어 가라고 이야기해줬기 때문일 것이다.

한 편의 연극을 만드는 일도 농사 짓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으니 말이다. 이 둘은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열정과 넉넉한 기다림을 가지고, 마라톤과 같은 긴 호흡으로 여유로운 틈새 안에서 정성스런 마음까지 담아내어야만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일이라는, 같은 부모를 가진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고 자라오며 느꼈던 땅끝마을, 해남의 바닷가 소나무 해송들은 육지의 소나무들과 사뭇 다르게 보였다. 거센 바닷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버티고 서서 전장을 지휘하는 장수와 같은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삼송은 내가 흔들림 없이 문화예술의 근간을 묵묵히 실천해 나가도록 가르쳐줬던 것 같다. 바람과 나무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끈기와 오기를 가지고 극복해낼 수 있는 탄탄한 맷집을 가질 수 있게 준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해남촌놈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해남하면 땅끝을 떠올린다. 많은 사람들이 여유롭고 한가로이 해남여행을 하고 싶어 땅끝 해남을 찾는다. 고향 사람을 마주 하는 것과 같은 수더분한 인정과 정감이 넘쳐나고, 어머니의 고운 얼굴 같은 뽀얀 황토땅과 어우러져 푸른 바다 위에 수놓아진 듯 떠 있는 섬들이 맞이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해남은 나의 고향이자 땅끝, 바다 끝을 넘어 다시 시작하고픈 사람들의 고향인 것이다.

해남이 마치 고향이라도 되는 냥 해남자랑을 푸짐하게 하시는 어른들이 계신다. 박정자 선생, 손숙 선생, 손진책 선생, 윤호진 선생, 정동환 선생, 김성녀 선생, 윤석화 선생, 한 분 한 분 이름만으로도 문화예술계 거물들이다. 긴 세월을 부모처럼, 형제처럼 묵묵히 지켜봐 주시며 걱정과 기대, 칭찬과 나무람을 해주시는 나의 정신적인 버팀목들이다.

나는 매년 빠짐없이 선생님들과의 해남여행을 준비한다. 대흥사를 둘러보고, 미황사 금강스님께 차 한 잔씩 얻어 마시고 땅끝마을로 향한다. 강진의 다산기념관을 올라서보고 울돌목을 건너 진도 운림산방에서 여유로움을 가진 뒤 해남 해창막걸리에서 저녁시간까지 행복함을 물씬 느끼신다. 1년에 한 번 갖는 이 발길을 고향에 소풍이라도 가듯 가슴이 뛸 듯이 기쁘다고 말씀해 주시기에 더욱 내 고향의 시간이 뿌듯하고 즐겁다.

또한 문화콘텐츠, 문화축제 등에 관심이 많은 명현관 군수는 이 선생님들의 해남 방문을 그 누구보다 앞서 기쁘고 반갑게, 그리고 넉넉히 맞이해줘 더욱 그러하다. 명 군수는 시대의 흐름이 의미하는 바를 통찰하고 문화예술에 관한 혜안과 뚝심으로 격조 높은 미래해남을 꿈꾸는 '명군수' 답게 문화예술인들을 예우하고 존중하는 분이다. 평소에도 나를 포함하여 해남 출신의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가들과 자주 소통하고 자문도 구하고 해서 해남대표문화축제, 해남스토리의 문화콘텐츠 개발,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큰 관심과 열정이 남다른 분이라고 느껴왔다.

모든 콘텐츠는 사람에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난다. 어쩌면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일 것이다.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창고, 내 고향 해남이 사람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선제적이고 저돌적으로 지혜를 모은다면, 훌륭한 천혜자원과 미래 콘텐츠가 융합된 멋진 작품과 축제를 만들어 낼 것이라 확신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얼마만큼 충실한가' 에 따라 삶의 값어치에 대한 평가가 정해진다고 하신 정우 스님의 말씀처럼 남의 것을 넘겨다보고 탐내는 것이 아닌 나에게 주어진 삶을 눈여겨보며 내 고향 해남의 논두렁 밭두렁 바닷바람이 가르쳐 준 교훈을 다시 한 번 되뇌어본다.

한순간도 곁을 떠나지 않는 마음의 스승이자 영혼과도 같은 내 고향이 있는 한 문화콘텐츠를 향한 나의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