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기(자유기고가)

 
 

"우리 집은 아들들만 학교 보내고 딸들은 집에서 일만 했지라"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의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온 할머니들의 한 맺힌 넋두리이다.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난 이 땅의 여성 대부분은 글을 배우지 못했다.

최근 각 지자체마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손주 또래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할머니들은 아이들처럼 해맑다. 평생을 문맹으로 살아온 팔순의 할머니들이 뒤늦게 배운 글로 지난한 삶을 풀어놓은 사연들을 책으로 엮어 화제가 되고 있다.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냐'는 차마 말로는 풀 수 없어 가슴 깊이 응어리가 되어버린 한을 팔순 넘어 배운 글로 항변하듯 드러낸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서툰 글씨는, 할머니의 맺힌 설움 풀어주는 한 편의 감동적인 시가 되었다. 할머니의 글은 머리에서 나오는 관념의 언어, 추상의 글이 아니다. 굴곡진 인생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언어, 공감의 글이다. 글은 가슴을 울리고, 적신다. 아래에 소개한 시는 팍팍한 가난을 꾸밈없이 써내려간 삶의 노래이다. 관념적 시어로는 표현 못할 가슴 찡한 묘사이다.

모 심그러 가도 쌀 두 되/ 똥소매 퍼내/

하루 점도록 보리밭에 찌끌어도/쌀 두 되.

― 최영자 할머니의 시 '가난'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여인들에게 문맹은, 글을 몰라 감수해야 할 불편함보다 글을 모른다는 부끄러움이 더 힘든 설움이었다. 늦었지만 지자체에서 실시하는 글쓰기 교육으로 문맹의 어둠을 뚫고 문명의 밝은 세상으로 나온 할머니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오랜 인생살이로 체득한 할머니들의 삶의 지혜가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할머니들의 행복을 기원한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가 있다. 문맹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평생을 교도소에서 보내야하는 한 여인의 애절한 사연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영화다.

나치치하에서 유태인 수용소 감시원으로 근무한 한나는 전쟁이 끝난 후 유태인 학살 방조죄로 법정에 선다. 한나는 혐의를 대체로 시인한다. 그러나 함께 재판을 받는 다른 여인들은 혐의를 부인하고, 서류도 한나가 작성했다고 모함한다. 한나는 서류작성은 하지 않았다고 완강하게 거부한다.

재판장이 확인을 위해 필적감정을 지시한다. 연필을 든 한나, 망설이다가 자신이 서류를 작성했다고 시인한다. 문맹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모함을 인정해버린 것이다. 한 때 사랑했던 마이클이 한나의 필적감정 거부를 보고, 한나가 문맹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마이클의 증언이면 한나의 혐의는 풀려질 수 있으나 마이클은 침묵한다. 한나는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변호사가 된 마이클이 책 읽는 음성을 녹음하여 한나에게 보낸다. 한나는 녹음음성과 도서실에서 대출받은 책의 철자를 하나하나 맞추어가며 글자를 익힌다. 마침내 글을 읽는다. 문맹의 비밀 감추려다 무기수가 된 한나, 비로소 문맹에서 벗어난다.

괘씸한 일본을 향한 분노 때문에 사족 몇 줄 덧붙인다.

일개 수용소의 감시원까지 책임을 물어 무기징역을 선고한 독일은 나치만행을 부끄러운 치욕의 역사로 인식한다. 하여 뼈저린 반성과 함께 나치 부역자들을 끝까지 찾아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2차 대전을 일으키고 조선을 침탈한 만행을 영광의 역사로 추억한다. 하여 틈만 나면 그 야만의 역사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 따위 수준의 일본에게 반성과 사과를 바라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아베는 우리의 힘이 강해질 때만 우리 앞에 꼬리 치는 푸들이 될 것이다, 트럼프에게 그랬듯이.

"일본은 종속과 지배밖에 모르는 민족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어록이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