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기(자유기고가)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신(神)의 본질을 고독이라 했다. 고독한 신이 심심한 나머지 천지를 창조하고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본질도 고독이라고 설파한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삶을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고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독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고독의 본질인 신에게 귀의하라는 것이다.

고독한 신이 흙으로 인간을 만드는 과정을 풍자한 소설이 있다.

정을병의 단편소설 '흙의 분량은 똑같다'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한 신, 마지막 엿샛날 흙을 빚어 자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한다. 인간을 창조하면서 닷새 동안의 천지만물 창조보다 더 심혈을 기울인다.

고민도 많이 한다. 자신을 닮은 인간이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이런저런불평과 항의를 할 거 같기 때문이다.

불평불만을 없애기 위해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처럼, 틀을 만들어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창조주로 자부하는 신으로서 그리 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 공장의 제품은 똑같아야하지만 신의 창조물 자연은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은 그 크기와 밝기가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별빛의 어울림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해변의 수많은 모래와 자갈도 그모양이 결코 똑같지는 않다.

이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은 획일적이지 않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들의 조화와 어울림에 있다.

창조주 신 드디어 결정했다.

"그래, 흙의 분량만 똑같이 하는 거야."

신은 손수 반죽한 흙을 다섯 덩이로 나누어 분량을 똑같게 한다. 한 치의 차이도 나지 않게 분량을 정확히 한다. 이렇게 나눈 흙을 빚어 하나씩 인간을 창조한다.

신에게 연습이란 없다. 흡족하지 않다고 버릴 수도 없다. 닷새 동안 천지만물의 창조로 피곤한 신, 마지막 심혈을 기울여 자신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인간은 얼굴에 정성을 쏟다 보니 가슴 쪽의 흙이 부족했다.

두 번째 인간은 부족했던 가슴 쪽 신경 쓰다 보니 하체가 부실했다.

세 번째, 드디어 신의 맘에 흡족한 아름다운 인간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네 번째 인간은 지쳐 흙손을 이용하니 신체가 허약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다 만들고 나니 아, 그만 흙이 한 줌 남고 말았다. 버리면 안 돼, 고추에 덧붙여버렸다.

소설은 이 다섯 유형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역정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세상의 비난 아랑곳 않는 낯 두꺼운 정치인,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이득만 추구하는 샤일록,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더욱 안타까운 시인, 이상세계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위인, 교도소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어둠의 자식 등 다섯 유형의 인간들은 생김새가 다른 만큼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다. 때문에 한 사람도 똑같은 얼굴을 하지 않는다. 얼굴이 다르듯 가치관이 다르고 개성도 다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울리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을 신이 내려다보신다면? "아름답다" 하실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자신의 삶에 만족 못한다.불평불만이 많다.

당신은 어떤 유형의 인간인가? 작가의 물음에 답할 차례다.

만약 나를 왜 이리 만들었냐고 신에게 항의한다면?

신, 껄껄 웃으며 대답하실 것이다.

"이놈아, 그래도 흙의 분량은 똑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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