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변호사)

 
 

지역감정의 역사적 뿌리라는 편견, 한양 중심의 지리적 사고, 유교적 세계관, 교통지리 정보 등 시대적 한계 등을 공제하고 나더라도 1751년에 출간된 '택리지(擇里志)'는 우리나라 인문지리학의 성취다. '택리지'는 해남을 이렇게 그렸다.

"해남과 강진은 제주에서 뭍으로 나오는 길목이라서 말, 소, 피혁, 진주, 자개, 귤, 유자, 말총, 대나무를 거래하여 이익을 얻고 있다. 그러나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고 바다와 가까워 겨울에도 초목이 시들지 않고 벌레가 동면을 취하지 않으며, 산바람과 바다 기운 탓에 후덥지근하여 장기와 전염병이 생긴다. 게다가 일본과 아주 가까워서 토질이 아무리 비옥하더라도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요즘 식의 언어로 풀이하자면 이렇다. 남해안 문화권이다. 제주와 육지교류의 중심이었다. 상업이 발달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겨울에도 따뜻하다. 왜구의 침입이 잦은 위험한 곳이다.

1751년은 지금부터 267년 전이다. 앞으로 267년 뒤인 2285년, 이 땅의 후손들은 해남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까. '택리지'의 서술 방식을 따르자면 오늘의 해남은 어떻게 기록해야 마땅할까.

'땅끝'이라는 자연지리적 특성이 맨 앞을 차지할 것이다.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이 다음일 것이다. 고구마, 절임 배추, 김, 전복, 거기다 다양한 음식문화 등. 두륜산 대흥사와 일지암, 달마산 자락의 미황사도 꼭 기록할 것 같다.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금호호도 있다.

또 무엇이 있을까. 칼럼을 쓰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다들 '땅끝'을 이야기한다.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땅끝'만을 이야기했다. 땅끝이라는 자연지리적 특성이 과도하게 강렬했다. 땅끝이라는 상징적 이미지가 해남의 블랙홀이었다.

이런 상징은 기뻐해야 할 일일까. 해남 사람은 어디 있을까. 땅끝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해남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는 어떻게 기록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의 해남에는 자연지리만 있고, 인문지리가 없다. 그것이 문제다.

불길한 통계에 주목한다. 지난해 진행된 '해남군 청년정책 실태조사'다. 해남 인구의 33.4%인 2만4639명(49세 기준)이 청년이다. 설문조사 청년 응답자 중 39.9%가 타지역으로 이주를 고려한 적이 있거나 고려 중이라고 했다.

청년의 3분의 1이 해남을 떠나려 한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 해남 땅은 거의 바다에 잠기게 된다. 그런데 그 전에 자칫 청년들이 떠나가고, 해남 사람의 역사와 문화가 사라지고 만다면.

나의 직계 선조들은 본래 경상도 사람들로 안동 땅에 살았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 선생에 연루됐다. 1500년경 땅끝 해남으로 귀양 왔다.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따라온 큰아들이 해남 땅에서 해남 사람과 결혼해 뿌리내렸다. 아버지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길에 올랐다. 이번엔 둘째 아들이 따라갔다. 둘째 아들은 북청에서 뿌리를 내렸다.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께서 일제시대 때 북청까지 찾아가 뿌리를 연결시킨 적도 있다.

할머니도 해남 분이었다. 당연히 아버지도 해남 사람이고, 어머니도 해남 사람이다. 나도 해남 사람이고, 아내도 해남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해남 사람만큼이나 나도 해남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조심스럽게 해남의 10년, 50년, 100년을 다루는 '해남미래비전위원회' 설치를 제안한다.

지역민과 출향 인사, 특히 은퇴한 원로, 학자, 기업인들이 함께 토론하고 지혜를 나누었으면 한다.

분기별로 해남과 광주, 서울을 오가며 회의를 하자. 대신 철저한 명예직이요, 재능기부로 운영한다. 국회의원이 바뀌고, 군수가 바뀌고, 군의원이 바뀌더라도 해남의 오늘과 미래를 위한 필요성 있는 미래비전을 만들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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