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변호사)

 
 

"때로는 높이높이 우뚝 서고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有時高高峰頂立 有時深深海底行)"(<아름다운 마무리>)

지난 5월, 학고재 갤러리에서는 법정스님(1932~2010)의 유품과 서화작품을 전시하는 '법정 대종사 속뜰을 기리며'가 열렸다. 자료들은 강원도 외딴곳에 '수류산방(樹流山房)'을 마련하고, 스님과 함께해 온 불자 부부가 간직해온 것들이다. 개막식에서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이 헌다의례를 했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물어야 한다"(<산에는 꽃이 피네>)

해남을 떠나 광주로 유학 갔던 그해, 중학교 때 영어를 가르치셨던 선생님의 댁을 찾았다.

스님의 범우사판 문고본 <무소유>를 선물로 주셨다. 스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정말이지 책장이 닳도록 읽었다. 제본이 헤지도록 들췄다. 나중엔 아예 비닐봉지에 담아서 가지고 다녔다. 고향을 떠나 수십 차례 이사 다니다 보니 어린 시절의 책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지만 <무소유>만은 모시고 다녔다. 인연이었으리라.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무소유>)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비로소 스님께 인사드릴 수 있었다. 성북동 길상사였다. "제 고향이 해남입니다", "나도 고향이 해남이요" 낯익은 고향의 성조였다. 스님께서는 4대강 사업을 염려하시며 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을 주문하셨다. 일어설 때는 스님 책에다 자필로 사인을 해 건네주셨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연이 되었다.

"저녁노을 앞에 설 때마다 우리들 삶의 끝도 그처럼 담담하고 그윽할 수 있을까 묻고 싶어진다.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꽃이 피었던 그 가지에서 무너져 내리듯이, 삶의 가지에서 미련 없이 떠나 대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봄 여름 가을 겨울>)

송광사 다비장에서 승가의 어른들과 문도들이 유골을 수습하고 떠난 뒤, 스님을 한없이 존경하던 어느 분께서 남은 재를 뒤적여 언뜻언뜻 보이는 흰빛의 조각들과 재를 한 움큼 손수건에 곱게 싸안았다. 생전에 소리 소문 없이 다녀가시던 고향 절 미황사로 모셔왔다. 금강스님과 수류산방에서 스님을 모시던 이들이 함께 모여 달마산 자락에 곱게 모셨다. 그렇게 해서 스님은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한 생애를 막음하는 죽음은 엄숙하다. 저마다 홀로 맞이하는 죽음이므로 타인의 죽음을 모방하거나 흉내 낼 수 없다. 그만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만큼 엄숙하다"(<아름다운 마무리>)

법정스님의 고향 문내면 선두리는 제법 큰 선창가 마을이다. 해남군은 몇 해 전부터 스님의 생가를 사들였고, 이어 주변의 몇 집까지 사들여 너른 마당도 만들었다. 고마운 인연이다. 이제 인연을 나눌 때다. 스님의 본지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입 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적은 것이 있으면 신선도 될 수 있다"(<오두막 편지>)

금강스님의 제안이다. "스님의 생가에 자그마한 도서관을 만들면 좋겠다. 스님이 직접 쓰신 서른 권의 책들, 스님이 좋아하셔서 추천했던 이백 여권의 책들, 스님을 기억하고 가르침을 옮긴 서른두 권의 책까지 모으면 조그맣고 예쁜 마을 도서관이 될 것이다" 금강스님이 덧붙였다. "생가터 맨 윗집에는 딱 한사람 들어갈 수 있는 텅 빈 작은 선방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누구든 이심전심으로 '무소유' 스님의 마음을 만날 수 있는, 맑고 아름다운 공간을 너무 거창하게는 말고, 작고 작고 맑고 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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