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변호사)

 
 

장성군은 우리나라 최대의 잔디생산지다. 전국 잔디의 2/3를 생산한다. 생산부터 출하까지 24시간 이내에 운동장에 배달되는 원스톱 시스템을 갖췄다. 축구장이건, 야구장이건, 골프장이건 그곳 잔디의 대부분은 '메이드 인 장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980년대 들어 양잠산업의 쇠락으로 고심하던 장성군 삼서면의 일부 주민들이 대체작목으로 잔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벼나 보리 대신 잔디 씨를 뿌렸다. 잡초가 황금작물이 되었다.

초기에 정부의 도움이라고는 없었다. 오로지 장성 농민들의 땀과 눈물이 거름이 됐다. 산은 많고, 널찍한 평야는 드문 장성 골짜기마다 잔디재배가 번져나갔다. 2011년 장성군은 '잔디유통센터'까지 건립했다. 잔디 농업을 잔디 산업으로 바꿔놓았다. 누군가는 장성을 두고 한국 잔디의 메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더구나 잔디재배에는 특별한 장점이 있었다. 대형 트랙터나 농기계가 거의 필요 없었다. 물론 농기계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벼농사에 비해 기곗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다루기도 편했다. 그러다 보니 고령의 농민들도, 영세 가구도 자가 영농이 가능했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해법이 됐다.

해남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갈수록 줄어든다. 초고령사회를 향해 속도를 더하고 있다. 인근 도시에 살림을 두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산부인과가 문을 닫는다. 어린이집, 유치원이 차례대로 문을 닫는다. 초·중·고생이 격감한다. 예식장이 사라진다. 빈집이 늘어난다. 폐허가 되는 집 또한 늘어난다. '나 홀로 사회'가 되어간다. 식당영업이 되지 않는다. 지역경제가 무너진다. 병원은 마치 요양병원뿐인 것 같다. 장례식장은 분명하게 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해남 또한 하나의 '지방'으로 전락하고 더 이상 안정적인 정주처가 되지 못한다. 악순환이다. 그래서 해남군의 2017년 12월 말 기준 주민등록인구도 7만5000명 선까지 무너졌다. 고령 인구비율은 매년 증가세를 보이며 29.7%로 곧 30%를 넘어설 것이다.

특별한 문제 제기가 아니다. 누구나 아는 문제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첫째는 선거제도의 한계다. 지방선거는 4년마다 되돌아온다. 문제는 4년 뒤의 선거를 담보 받을 수 없기에 정책이나 비전이 4년을 단위로 단절되곤 한다는 점이다. 단기적 성과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둘째는 '지방'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한국적 현실이다. 서울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있다. 서울이 지방이라고. 그렇다. 서울도 지방이다. '지방'의 본래 용법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광주에 지방법원이 있듯이, 서울에도 지방법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부산조차도 '지방'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방'이라는 용어는 마치 인류학에서 문화 개념이 그러한 것처럼 '창고 세일'과 같다(레나토 로살도, 권숙인 옮김,《문화와 진리》)" 개별성, 독자성, 다양성이 무시된다는 의미다. 본래적 의미의 지방자치가 획일화되곤 만다.

셋째는 정치적 책임성의 결여다. 책임을 상급 자치단체나 중앙정부에 전가해버리는 것이다. 해남이라는 지방정부가 갖는 예산이나 조직의 한계를 서둘러 받아들이고 문제를 국가나 시대 차원의 문제로 환치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해남 정치나 행정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레 포기해버린다. 이건 해남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다른 동네도 똑같지 않냐며 스스로 위로한다. 지방정부는 지방정부끼리 지방의회는 지방의회끼리 서로를 거울삼아, 서로를 비춰보고 안도하는 부정의 '거울 효과'다. 이번만큼은 다를 수 있을까. 해남의 명예를 되살리고 문제해결을 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시작된다. 실천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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