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나는 말하고 싶다 "해남의 또 다른 아픈 역사"
3. 38년이 지나 다시 서 보는 그 곳… 사자상은 그 날을 알고 있다우슬재 총격 여러 건 가능성
죽음의 현장에서 당시 증언
이창섭 기자  |  nonno@h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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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05  10: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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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대오 씨가 우슬재 사자상 앞에서 80년 5·18 당시 총격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송대오 씨가 우슬재에 있는 5·18 사적지를 둘러보며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글씨가 지워져 가까이에서도 어떤 내용인지 알기 힘든 우슬재 5·18사적지 모습. 상등리 국도변 5·18표지석도 문구수정과 교체가 시급한 상황이다. <위부터 시계 방향>

| 싣는 순서 |

1. 그 날 그 곳의 아픔을 기억하다
2. 멈춰버린 38년 그리고 68년
3. 역사의 현장에 서다 - 5·18현장의 역사와 현재
4. 역사의 현장에 서다 - 파도야 너는 아느냐, 갈매기섬의 한을
5. 나는 말하고 싶다 - 5·18 그 날의 진실을
6. 나는 말하고 싶다 - 68년동안 감춰온 아픔을
7. 진정한 치유의 출발점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서부터

올해 75살인 송대오 씨. 80년 당시 전남매일 해남주재기자로 역사적 현장 곳곳을 누비던 그였지만 취재수첩과 카메라가 있던 손에는 현재 지팡이가 놓여있다. 2005년 갑자기 쓰러져 뇌병변 2급 장애를 앓고 있고 최근에는 다리쪽에 수술까지 해서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다.

그런 그가 자신만이라도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기록에 남겨야 한다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취재진과 함께 지난달 29일 역사의 현장을 함께 방문했다.

송대오 씨는 우슬재 총격사건을 직접 목격한 당사자이다. 주재기자생활을 하며 당시 해남경찰서 수사과장과 친분이 있었고 해남 군부대 보안대장과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생활을 같이 해 친분이 있었다.

해남에서도 5·18과 관련해 시위가 발생하자 수사과장과 보안대장은 시위대와 군부대간 대치가 있거나 급박한 상황이 발생하면 중재를 해달라는 차원에서 그에게 미리 알렸고 그래서 현장을 자연스럽게 오고가며 역사적 사건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80년 당시 우슬재에서의 총격사건은 5월 23일 새벽 나주나 광주 쪽에서 해남으로 오던 시민과 시위대들에게 무장군인이 무차별 발포를 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여기서 1명의 사망자(나주 영산포 출신)가 발생한 것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우슬재에 있는 5·18민중항쟁 사적지에도 이같은 내용으로 기록이 돼 있다.

그렇지만 5·18단체와 관계자들은 이 곳에서만 최소 3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송대오 씨가 목격한 사실은 이렇다.

그는 시위대가 나주경찰서장 지프차를 탈취해 해남쪽으로 오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군부대가 매복해 있는 우슬재 현장으로 보안대장과 갔다고 한다. 그 날이 22일인지 23일인지 뚜렷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저녁을 먹고 지금의 사자상이 있는 자리로 바로 올라갔기 때문에 밤 9시~10시 무렵으로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경찰과 군부대에서는 군부대와 시위대의 충돌을 막기 위해 그에게 부탁을 했고 그는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당시 알고 지내던 A 씨에게 지금의 옥천파출소 자리에서 이른바 망을 보게 한 뒤 시위대 차량인지 아니면 그냥 일반차량인지 살펴서 무전기로 보안대장에게 알리도록 했다.

A 씨는 시민군으로 보이는 지프차와 버스가 옥천지서 쪽을 지나자 큰 충돌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이상이 없으니 그냥 가도록 하라고 무전을 보냈다. 그렇지만 지금의 사자상 옆 수풀에 매복해 있던 15~20명 정도의 군인(방위병)들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총을 발사했고 집중사격이 이뤄졌다.

그는 "사격이 있은 뒤 현장에서 3명이 머리 등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지. 그런데 육안으로 봐도 죽은 사람으로 보였어. 그만큼 상태가 안 좋았으니, 당시 정규병들이 목포연대로 다 빠져나가고 훈련이 안 된 방위병들이 동원된 상태라 아마도 시위대로 보이는 차량이 들이닥치자 무서워서 또는 실수로 누군가 총을 발사했고 이어서 집중사격이 이뤄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어"

취재진은 그에게 지금까지 우슬재에서의 총격은 23일 새벽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5·18사적지에도 그렇게 기록이 돼 있다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22일인지 23일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밤으로 기억한다"고 거듭 밝히고 "세월이 많이 흘러 당시 희생자와 목격자 등이 하나 둘씩 나이가 들어 숨지기도 하고 있는데, 그래서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이뤄져 더 이상 아픈 오월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라이온스클럽을 상징하는 저 사자상이 80년 5·18 이전에 만들어졌는데 아마 계속 진상규명이 미뤄지고 나를 포함해 다 나이가 들어 희생자와 목격자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저 사자상은 여전히 그 날을 기억하고 그 날의 진실을 말하고 있을거여"

시위대의 군부대 기습을 막기 위해 당시 군인들이 22일 밤 무렵부터 매복을 했던 점으로 미뤄 송 씨가 기억하고 있는 총격사건은 22일 밤을 얘기할 가능성이 크며 송 씨의 말대로라면 결국 우슬재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1건이 아닌 여러 건의 총격사건이 있었고 그래서 우슬재에서만 사망자가 1명이 아니라 여러명이었을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23일 새벽 발생한 총격사건 현장에는 누가 있었던 것일까? 알음알음 취재를 통해 당시 우슬재 현장에서 직접 총격을 당하고 사망자를 목격한 5·18나주동지회 서환기 부회장을 찾아 그와 통화를 할 수 있게 됐다.

   
▲ 5·18나주동지회 서환기 부회장.

그는 당시 19살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때로 나주에서도 광주 소식을 전해듣고 시위가 있었으며 해남쪽 동향을 살피기 위해 지인들과 지프차를 타고 23일 새벽 5시~6시 사이에 우슬재쪽을 지나게 됐다고 한다.

지프차에는 5~6명 정도가 타 있었고 뒤에 나주나 광주에서 온 민간인 등 10여명을 태운 화물차가 뒤따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군부대가 매복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여서 우슬재를 지나가다 총소리가 들리자 지프차의 경우 바로 차를 돌렸으며 도로가 비포장인데다 좁다보니 수로에 빠지게 됐고 다행히 총탄을 피했지만 뒤따르던 화물차는 그대로 지나가다 무차별 집중사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제는 죽었구나 할 정도로 천둥소리마냥 총소리가 계속 빗발쳤고 이후 몇 명이 죽고 다친지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화물차에서 1명이 죽고 1명이 크게 다친 것은 직접 목격했는데, 죽은 사람이 나와 같은 나주 영산포 출신으로 평소 알고 지내던 2년 선배인 B 씨였지"

그는 이후 '생존자 있으면 두 손을 들고 나와라'라는 군인들의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해남 군부대로 끌려갔으며 공간이 협소해 며칠 동안 해남경찰서 유치장과 군부대를 오가며 손이 묶인 채로 잠이 들었고 다시 상무대로 이송돼 고초를 겪다가 7월쯤에 풀려났다고 한다.

서 씨의 주장은 지금까지 알려진 우슬재에서의 총격사건과 일치하는 것으로 실제 정부에서 인정한 사망자도 나주 영산포 출신의 B 씨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총격이 있었던 시간과 사망자 수, 그리고 차의 종류 등이 모두 다르다.

또 송대오 씨는 나주경찰서장 지프차를 시위대가 탈취해 해남으로 오고 있다는 첩보를 군에서 입수해 매복을 하고 있었다고 했지만 서환기 씨는 탈취한 게 아니라 당시에는 상황이 혼잡했기 때문에 버려진 것을 타고 온 것일 뿐 이것이 경찰서장 차인지 알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해남에서는 지금까지 우슬재에서 1명, 상등리에서 1명 등 5·18과 관련해 2명이 숨졌다고 정부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당사자와 목격자들의 여러 가지 증언들이 이어지고 있다. 또 당시 해남군청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C 씨는 여러차례 증언을 통해 23일 오전 6시쯤 군부대 연락을 받고 우슬재와 상등리에서 시신을 수습했는데 우슬재에서 3구, 상등리에서 1구 등 시체 4구가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증언자들은 총격이 있었던 현장이 아닌, 군부대 안에서 관들과 무덤을 봤으며 일부는 군부대 인근에 앞매장이 이뤄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해남에서 5·18과 관련한 진상규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달 18일 해남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남지역 5·18사적지 둘러보기 행사를 진행한 해남 5·18동지회 김병일 회장은 우슬재 등 5·18 표지석이 자리한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예전에 표지석이 황동으로 만들어졌었는데 도난이나 훼손되고 그래서 이렇게 다시 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글자가 지워지고 잘 안 보이고 문구도 잘못된 것이 많아 현재 정비를 요구해 놓은 상탭니다"

지난달 29일 우슬재 현장을 방문한 송대오 씨는 표지석을 보더니 "가수들 노래비도 이렇게 안 만든다. 젊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죽었는데 이를 제대로 기리지는 못할망정 잘 보이지도 않고 내용도 다르고 대충 쓴 것처럼 보여서 마음이 아플 뿐이네"라고 말했다.

해남에는 5·18과 관련한 사적지가 해남군청 앞과 해남중학교 상등리 국도변, 백야리 군부대 앞, 우슬재 2곳, 대흥사 일대 2곳 등 모두 8곳에 달하고 있다.

이 곳에는 모두 대리석으로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데 문제는 학생들에게 역사교육과 체험학습을 전하고 알려주려 해도 당시 5·18관계자들이 역사의 현장을 방문해 그날을 기리려 해도 부끄러움과 허탈함이 먼저 앞선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상황은 이렇다.

해남군은 예전에 황동으로 만들어진 표지판이 도난되고 훼손되는 문제점이 있어 8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지난 2015년에 대리석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대리석은 몇 년 지나지도 않아 글씨가 지워져서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여러차례 문구수정 요청이 있었지만 당시 5·18단체와 협의도 없이 그냥 예전 문구 그대로를 사용하면서 잘못된 역사, 확인되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는 오점을 남겼다.

또 도로변에 있는 표지석의 경우 덩그러니 표지석만 놓여있다 보니 차에서 내리지 않는 이상 이 곳이 5·18사적지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누군가에는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로 전락해버렸다. 해남군이 애써 예산을 투입해 잘 해보려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관리부실이라는 지적을 해마다 접하게 되는 상황이 됐다.

해남 5·18동지회는 당시 희생자와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할 때 우슬재의 경우 '광주를 향해 가던' 부분과 '1명의 사망자' 부분을 '광주에서 해남으로 오던'과 '다수의 사망자'로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상등리 국도변도 '5·18 민중항쟁 소식을 진도군에 전하기 위해 해남에서 진도로 가던' 부분과 '1명이 사망한' 부분을 '진도에서 해남으로 오던'과 '다수가 사망한'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구 수정이 필요한 부분은 8곳의 표지석 가운데 모두 7곳에 달하고 있다.

해남군은 올 하반기에 추경에 반영해 문구 수정과 대리석 교체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예산이 없어서, 군의 수장이 없어서 몇 년 째 잘못된 상황인지 알면서도 교체나 수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해남 5·18 역사적 현장들.

진상규명과 함께 해남군과 지역사회가 풀어야 할 또다른 시급한 현안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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