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도 5·18역사, 처음 알았어요
5·18계기 교육과 정신 계승 필요

| 싣는 순서 |

1. 그 날 그 곳의 아픔을 기억하다
2. 멈춰버린 38년 그리고 68년
3. 역사의 현장에 서다 - 5·18현장의 역사와 현재
4. 역사의 현장에 서다 - 파도야 너는 아느냐, 갈매기섬의 한을
5. 나는 말하고 싶다 - 5·18 그 날의 진실을
6. 나는 말하고 싶다 - 68년동안 감춰온 아픔을
7. 진정한 치유의 출발점은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서부터

▲ 해남고 학생들이 학교선배인 고 정상덕 씨의 비석을 닦고 있다.
▲ 해남고 학생들이 학교선배인 고 정상덕 씨의 비석을 닦고 있다.
▲ 김병일 회장이 해남고 학생들에게 해남읍 백야리 군부대 앞에 있는 5·18사적지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김병일 회장이 해남고 학생들에게 해남읍 백야리 군부대 앞에 있는 5·18사적지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5·18민중항쟁 38주년였던 지난 18일, 해남고등학교 1학년 학생 35명은 특별한 경험을 했다. 오전에 광주로 출발해 상무대 영창을 체험하고 5·18국립묘지를 참배한 데 이어 오후에는 해남에 있는 5·18사적지를 둘러봤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5·18민중항쟁은 광주가 주무대였지만 해남에서도 그 날 민주화운동이 있었고 희생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해남에도 5·18사적지가 있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학생들이 이날 처음 찾은 곳은 5·18자유공원에 있는 상무대 영창과 법정이었다. 이 곳은 5·18 당시 계엄군이 고등학교 2학년 학생부터 70대 노인까지 5·18시위자 3000여명을 끌고가 모진 고문과 폭행을 하고 내란주동자가 누구냐며 거짓자백을 강요받던 곳이다.

학생들은 실제 영창에 들어가 숙연한 자세로 5·18관계자들의 설명을 들었다. 영창 한 칸에 30명이 수용가능 하지만 당시 80명에서 150명이 갇혀 지냈고 조금만 움직여도 폭행을 당하고 배고픔과 피부병, 냄새로 인권유린을 당해야 했다. 또 군인들의 억지자백 강요에 항의하며 한 수형자의 경우 영창 안에서 자해를 했고 1981년 풀려난 뒤 정신병원 등을 전전하며 20년 가까이 힘든 생활을 하다 끝내 숨졌다는 얘기에 학생들의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학생들은 5·18 국립묘지에서 뒤늦게 학교 선배를 만날 수 있었다. 5·18국립묘지에는 5·18당시 마산면 상등리에서 군인들의 무차별 사격에 부상을 당해 1년 넘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결국 숨진 고 정상덕 씨가 안장돼 있는데 정 씨는 당시 해남고 3학년이었다.

학생들은 한창 공부하고 꿈을 키워나가야 했던 학교 선배가 국가폭력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사망하게 된 사건의 경위를 설명들었다. 그리고 정 씨를 비롯해 5·18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5·18희생자들의 비석을 말없이 닦아내려갔다.

안상욱 군은 "말로만 듣던 5·18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체험하고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특히 학교 선배님이 이 곳에 안장돼 있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5·18의 역사와 그 분들의 희생이 있어 지금의 저희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광주를 떠나 해남으로 다시 발길을 옮겨 해남에 있는 5·18사적지 8곳 가운데 우슬재 2곳과 상등리 국도면, 그리고 백야리 군부대 앞 등 4곳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해남에 5·18사적지가 있는지도 그리고 이렇게 많은지도 잘 몰랐던 학생들은 이 곳이 사적지 가 되고 표지석이 세워진 이유에 대해 그리고 5·18당시 해남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해남에서 2명이 숨진 것으로 인정됐지만 최소 7명 이상이 숨졌다는 증언이 있고 우슬재와 상등리에서 투항하는 시위대에 조준사격이 있었지만 여전히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들을 전해듣고는 질문을 쏟아냈다. "국가에서는 왜 2명 밖에 인정을 안해줬나요?", "총을 맞은 시위대는 그 뒤에 어떻게 됐나요?", "사망자는 해남사람이었나요?"

전예진 양은 "5·18민중항쟁이 광주에서만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해남에서도 민주화운동이 있었고 희생이 있었는지 처음 알게 됐다"며 "열사들이 힘들게 지켜낸 민주주의에 대해 더 깊게, 더 고맙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며 이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겠다"고 밝혔다.

이날 5·18체험행사는 전라남도에서 예산을 지원받아 38년만에 학생들을 상대로 처음 이뤄졌다. 5·18의 역사와 아픔은 해남에도 존재하고 풀리지 않는 진실또한 계속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관심과 진실규명 노력은 미진하기만 하다.

이날 5·18체험행사를 함께 한 해남 5·18동지회 김병일 회장은 "해남지역 5·18피해자와 증언자 상당수가 70대 이상이고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다"며 "5·18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지자체와 지역사회에서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국전쟁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아버지만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 광주시 월남동 김한택 씨.
▲ 광주시 월남동 김한택 씨.

올해 69살인 김한택 씨. 광주시 월남동에서 살고 있는 그는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70여년동안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는 울분을 1시간여동안 토해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갓난아이였던 김씨는 당시 30대의 나이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김 씨가 어머니를 통해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송지면과 현산면 경계인 월송마을에서 살았던 김 씨의 아버지는 당시 이장을 할 정도로 명성도 있고 논밭도 많아 부유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밀려내려오며 마을에도 폭풍이 몰아쳤다.

인민군들은 총을 들이대며 돼지를 잡아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돼지를 잡아줬을 뿐인데 이 후 인민군이 물러가고 서울이 수복된 후 경찰들이 들이닥쳐 김 씨의 아버지를 포함해 마을주민 수십명을 딱골재로 끌고가 사살했다고 한다.

인민군을 도왔다는 부역혐의였다. 당시 시신들은 머리에 총을 맞았고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서 손톱이 벗겨지고 손 지문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손가락질을 피해 그리고 살기 위해 어머니는 자녀들을 외갓집이나 남의 집에 맡겨야 했고 그렇게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김 씨는 어려서부터 외갓집이나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이른바 머슴살이를 해야 했고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해 글도 모르는데다 부역혐의 가족이라는 딱지 때문에 젊어서는 변변치 않은 직장도 구할 수 없어 구두닦이와 식당 일, 노동 일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다고 한다.

김 씨는 "어려서부터 하도 일을 많이 해 지금은 등을 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굽어있다"며 "힘들게 일한 것도 그렇지만 배우지 못해 글자를 아직도 모르는 것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전쟁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아버지만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안됐을 텐데…"하며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김 씨는 10여년 전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상조사에 나섰을 때 피해신청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20대 후반에 결혼을 해서 가족을 이루고 살다 보니 정말로 먹고 사느라 힘들고 바빠서 피해신청을 받는지도 몰랐고 하는 방법도 몰랐던 데다 혹시라도 자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해서 쉬쉬하고 드러내지 않아왔다"고 말했다. 김 씨는 "아버지와 우리 가족 그리고 나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꼭 진실이 밝혀지고 뒤늦게나마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됐으면 하며 해남에 한국전쟁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라도 꼭 세워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 광주시 주월동 김대환 씨.
▲ 광주시 주월동 김대환 씨.

김 씨와 인사를 나누고 광주시 주월동에 사는 77살 김대환 씨 집을 방문했다. 한국전쟁 당시 9살였던 그는 부모와 친형, 여동생, 숙부와 숙모 등 모두 6명을 잃었다. 가족들은 이른바 우익청년단과 경찰에 의해 부역 혐의로 지서 등으로 끌려 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당시 김 씨의 가족 가운데 할아버지와 친누나 그리고 자신만이 살아 남았다. 김 씨 역시 먹고 살기 위해, 따가운 시선을 피해 외갓집과 남의 집 농삿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앞길이 막막해 군대에 지원한 뒤 우연히 배운 타이어 만드는 기술을 통해 금호타이어의 전신인 삼양타이어에 들어가 공장 일을 해왔다.

한달에 하루 쉬는 고된 일을 계속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자녀들의 학자금을 마련했다. 이제 성장한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자녀들이 혹시 피해를 볼까 가슴에 묻고 내색을 하지 않은 것인데 그래서 김 씨도 피해신청을 하지 않았다. 김 씨는 "힘없이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의 한과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금이라도 정부차원에서 추가로 조치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고 말했다.

해남에서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희생된 민간인이 2500여명에서 3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10여년 전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사건은 200여건에 불과했고 이 가운데 159명만이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로 인정 받았다.

계곡면과 송지면, 마산면 등 곳곳에 역사의 현장이 남아있지만 역사적 장소임을 알리는 표지석 하나 없이 버려진 땅으로 방치되고 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특별법 제정을 통해 정부가 피해신청을 다시 받고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나서며 지자체 차원에서 추모탑이나 위령비 건설 등 추모사업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다.

현재 6·13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 가운데 해남의 5·18과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사건과 관련해 공약을 내세운 후보는 한명도 없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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