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변호사)

 
 

"태초에 땅이 생성되었고 인류가 발생하였으며, 한겨레를 이루어 국토를 그은 다음, 국가를 세웠으니 맨 위가 백두이며 맨 아래가 이 사자봉이다. 우리 조상들이 이름하여 땅끝 또는 토말이라고 하였고 북위 34도 17분 38초이며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이다. 동포여, 여기 서서 저 넓은 대자연을 굽이 보며 조국의 무궁을 노래하자"

우록 선생이 쓰신 토말비다. 땅끝의 역사와 가치를 제대로 담은 시대의 명품이다. 고맙게도 나는 선생이 직접 써주신 토말비문을 둘이나 가지고 있다.

선생의 몸이 불편해지시기 전, 학동 댁에서 선생님과 술잔을 나누다가 토말비문 작품을 부탁드렸다. 어느 날, 댁에 들렀더니 화선지에 먹으로 쓴 작품 한 점을 내놓으셨다. 땅끝 비문이었다. "최 변호사, 이 작품 중에 틀린 데를 찾아봐" 천진스럽게 웃으셨다. 몇 번을 읽어봐도 틀린 데를 찾을 수 없었다. "도저히 못 찾겠는데요?" 부끄러운 웃음이었다.

선생님이 지적해 주셨다. 희한하게도 '전라남도'가 빠져있었다. 그러니까 곧바로 '대한민국 해남군'으로 넘어가고 말았던 것. 그런 다음, 선생께서는 오탈자 없는 제대로 쓰신 작품 한 점을 다시 펼쳐놓으셨다. "이건 제대로 쓴 거야. 가져가" 그래서 작품 두 점을 신문지에 말아 서울로 가져와 액자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선생이 직접 쓰신 토말비문 작품 두 점을 소장하게 됐다. 땅끝 해남을 고향으로 둔 사람으로서 이보다 가치 있는 작품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선생의 한옥 처마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無量壽閣(무량수각)' 현판이 걸려있었다. 대흥사에 있는 추사의 '無量壽閣' 현판을 탁본하신 다음 다시 판각한 작품이었다. 선생의 한옥에는 차양시설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현판 아래쪽 사분의 일 부분부터는 자꾸 들치는 비에 젖어 까무잡잡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 용기를 내어 말씀드렸다.

"저 無量壽閣 현판, 저 주실래요? 자꾸 욕심이나요"

"그래, 당장 떼줄게"

"생각보다 커서 지금 가져가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그래, 그러면 좀 손질해서 서울로 보내줄게"

얼마 뒤, 사무실로 현판이 배달되어 왔다. 워낙 추사를 존경했던지라 집 거실에 걸어두고 살았다. 정치를 그만두고 현업으로 복귀하면서 선생의 현판이 생각났다. 법무법인 회의실에 내다 걸었다.

오는 사람들에게 우록 선생의 이야기와 함께 추사의 귀양길 이야기를 엮어 전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異苔同岑(이태동잠)'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한 봉우리의 다른 이끼다. 서로 다른 이끼들이 같은 묏부리에 모여 산다는 말이다. 중국 동진시대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곽박(郭璞, 276-324)이 가까운 친구인 온교(溫嶠)에게 보낸 시에서 유래한다.

어느 날, 선생 댁에 들렀더니 '異苔同岑'이라는 서예 작품을 내어놓으셨다. "내가 최 변호사 생각하면서 직접 썼어. 전에 추사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 학자가 추사에게 해줬던 말이야. 아마 작품도 있을걸?" 선생 특유의 필법으로 활연하게 쓴 글씨였다. 참으로 감사한 뜻과 글과 글씨라서 큰절 드리며 받았다. 어린 나에게 보여주신 참으로 겸손하신 은혜이자 우정이었다.

화산의 부모님 댁만큼이나 학동의 선생님 댁 가는 길이 곧 고향 가는 길이었다. 그곳이 곧 고향이었다. 선생이 곧 해남이고, 선생이 고향이었다. 학동 댁에서 해남사람을 만났고, 해남의 역사와 문화를 배웠다.

선생께서는 2003년 3월 29일, 영원히 고향을 떠나셨다. 선생께서 쓰시던 해남신문의 칼럼은 명품이었다. 그 칼럼의 끝 문장은 늘 이렇게 끝 맺음 됐다. 선생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 그 문장을 빌어 오는 것으로 우록 선생을 그리워한다.

그리운 선생님. "더질 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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