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등리,우슬재 다수 사망 주장
당시 부상자인 김병용씨 증언

▲ 5·18 당시 상등리 국도변에서 군부대의 총격을 맞아 폐쪽에 관통상을 입은 김병용 씨가 부상부위를 가리키며 눈을 감고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 5·18 당시 상등리 국도변에서 군부대의 총격을 맞아 폐쪽에 관통상을 입은 김병용 씨가 부상부위를 가리키며 눈을 감고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5·18민중항쟁 당시 해남에서 투항하는 시위대를 향해 향토사단(31사단)이 무차별 발포해 다수가 숨졌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어 진상규명이 필요한 상황이다.

해남에서는 80년 5월 21일과 22일 대규모 집회와 무기 탈취 그리고 백야리 군부대 앞에서 수백여명의 시위대와 군부대의 대치상황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주민들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기를 회수해 군부대에 반납하게 된다. 그러나 무기 반납 이후 군부대가 일부 지역에서 매복을 하면서 23일 총격전이 벌어져 우슬재와 상등리 국도변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공식적으로는 우슬재에서 1명, 상등리에서 1명이 숨졌고 상등리에서 부상을 당했던 1명은 이후 병원 치료과정에서 후유증으로 숨졌다.

문제는 당시 총격전 상황에서 계엄군이 아닌 향토사단에 의해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는 점과 무기를 반납해 무장해제인 상황에서 군부대가 의도적으로 매복한 다음 지나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를 했고 쏘지말라며 투항을 했는데도 계속 발포가 이어져 사망자가 발생했고 사망자도 공식 기록보다 훨씬 더 많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으로 상등리 국도변에서 폐쪽에 관통상을 입었던 김병용(55· 해남청년회의소 특우회 회장)씨는 "무장한 상태도 아니었고 무기를 탈취할 목적도 아닌 상태에서 진도에 갔다가 시위대 10여명이 버스 2대로 나뉘어 해남으로 귀가하는 도중이였는데 매복한 군인들에 의해 무차별적인 발포가 있었고 투항하면 총을 쏘지 않는다고 해 손을 들고 버스 밖으로 나갔지만 총이 계속 발포됐다"며 "이후 타이어 밑에 숨어 투항할테니 총을 쏘지 말라고 외치고 다시 손을 들고 나갔지만 발포가 멈추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김 씨는 폐쪽에 총알이 관통해 피를 흘린 상태로 보리밭을 기다시피해 현장에서 벗어났다가 군인들에 의해 발견돼 일단 군부대 의무대로 옮겨졌다.

김 씨는 "군부대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을 때 병장 한명이 다가와 중대장이 사격명령을 해서 사격을 했고 그나마 자신이 조준 사격을 의도적으로 피해 사상자가 덜 났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5·18동지회 김병일 회장은 "상등리뿐만 아니라 우슬재에서도 똑같이 투항하겠다는 시위대를 향해 군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사격과 수류탄을 던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며 "당시 시체를 수습했던 해남군청 공무원의 증언에 따르면 2곳에서 시체 4구가 수습됐고 군부대에 서너개의 무덤이 더 있었다고 말해 최소한 4명에서 많게는 7명이 숨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5·18당사자들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청문회나 진상규명 과정에서 이 부분은 흐지부지 됐고 군에서는 지금까지도 향토사단에 의한 유혈진압은 없었고 시위대들이 군부대를 기습하려 해 발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병용 씨는 "해남의 5·18에 대한 진상은 지금도 은폐되고 있는 상황이다"며 "지금이라도 당시 중대장과 대대장, 사단장 등 지휘체계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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