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자(보길도비파원 원장)

 
 

세연정과 동천석실, 낙서재가 있는 보길도 고산윤선도유적지 옆에 살면서 매일 오고가는 관광객들을 만나고 있다. 요즘 관광의 대세가 걷기열풍으로 옮겨가면서 예전처럼 관광지의 문화와 정신을 음미하는 문화관광과는 멀어졌다고는 하지만 보길도의 가치는 뭐니 뭐니 해도 전복도, 천혜의 경관도 아닌, 고산이 발견한 부용동 일대의 도가적 기류와 '어부사시사'의 산실로서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는 이런 뜬구름 같은 이야기가 어떻게 잠깐 스쳐가는 여행자들에게 전달될 것인가. 그들은 소문에 비해 그리 현실적이지 않는 관광요소들에 많이 실망하면서 돌아가는 것 같다.

같은 고산의 유적지인 해남 고산유물전시관에서는 지금 '공재 윤두서 일가의 풍속화와 진경산수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평소 접하기 힘들었던 공재일가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전시회에는 국보 240호인 '공재자화상'과 보물 481호인 '가전고화첩' 진본은 물론 최근 발굴된 윤위의 '구택규 초상화'와 공재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천하지도'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고산을 비롯한 해남윤씨가의 유물이 오롯이 보관된 곳인 만큼 일 년 열두 달 이런 손에 잡히는 전시기획들이 가능할 것이다. 보길도에서 볼 때 이런 방대한 유물을 차지한 해남이 부럽다.

보길도는 1637년 병자호란 시 임금을 구하러 떠났던 고산이 강화도에서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잠시 쉬어 갈 생각에 닻을 내린 곳이다. 그러나 고산은 임금의 부름을 받아 한양에 머물 때나 유배형에 처해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길도에서 지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해남에서는 6년, 보길도에서 17년을 살았다고 한다. 해남의 본가보다 보길도에 머문 시간이 더 많았고, 죽음을 맞이한 곳도 해남의 본가가 아니라 보길도 부용동의 낙서재였다. 고산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어쩌면 보길도였던 셈이다.

아쉬운 것은 고산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두 문화명소가 왜 좀 더 다양한 교류를 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보길도 고산유적지에는 아쉽게도 유물다운 유물이 전혀 없다. 그 사람이 여기에 존재했다는 것은 다만 복원된 건축물들과 지명에만 남아있을 뿐 숨결까지 느낄 수 있는 손때 묻은 흔적들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해남 연동과 보길도는 관광콘텐츠를 공유하고 더 입체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해남 유물전시관의 기획들은 보길도에서도 하다못해 화상으로라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일들이 큐레이터의 몫이다.

열화당에서 펴낸 자료집에 의하면 고산은 '사람과 자연이 합일하는 유교적 이상향을 갈망해가는 곳마다 원림을 만들고 거택을 조성했지만, 유학의 도그마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의 새 조류와 가치를 수용하고 실천하는 데 대대로 소홀하지 않았던 미덕이 문화명가를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고 한다. 고산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이런 내용들이 따로, 또는 동시다발적으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더욱 매력적인, 미켈란젤로에 비견할 천재적 예술가인 '고산'을 우리는 지자체단위의 단편적 해석으로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외롭고 고독했던 비운의 정치가이면서 '어부사시사'를 지어 우리 문학사에 거대한 봉우리 하나를 쌓은 최고의 시인 윤선도의 삶을 그의 비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음미해본다.

"비간(比干)은 심장을 갈랐고 / 백이(伯夷)는 굶어서 죽었고 / 굴원(屈原)은 강에 몸을 던졌지만 / 해옹(海翁)은 곤궁해질수록 더욱 굳세져 /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으니 / 의로움을 보고 목숨을 건 것은 한가지네."『미수기언(眉수記言)』, '해옹윤참의 비문(海翁尹參議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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