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었던 열네 살 소녀, 소녀는 영문도 모른 채 부모와 떨어져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처참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소녀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고 싶었던 스물아홉의 청년, 청년은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힘겹게 시를 쓴다. 그러나 청년은 결국 자신의 시집을 내지 못하고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영화 '귀향'과 '동주'는 개인의 작은 소망 하나 이룰 수 없었던 슬픈 시대의 이야기다. 사상과 이념, 혹은 전체를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저질러졌던 수많은 폭력과 탄압, 힘 있는 인간의 그릇된 생각과 욕심이 나은 권력이 얼마나 끔찍하게 많은 사람들의 작은 희망 한 조각들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지, 두 영화는 담담하게 위로하듯 들려준다.

나라를 되찾은 지 70년이 지난 지금, 이 슬픈 이야기는 끝이 났을까? 어쩌면 지금도 유효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끌어내린다.

광복 이후 전쟁으로 최빈국이 된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이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낸 나라, 그러나 이면에는 '경제 성장'이라는 이유로 당연시 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눈물이 있었다. 정치는 경제와 나라를 위한다는 논리로 독재와 탄압을 정당화 했고, 급격한 경제 성장이 나은 열악한 노동 환경은 경제 살리기라는 이유로 고칠 기회를 놓치고 조직 사회의 잘못된 문화와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작년 말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합의를 했지만, 합의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소녀들을 대변하는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사죄와 위로가 선행되고, 그분들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치적인 논리가 우선시 되어 다뤄지고 말았다.

이 문제는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이며, 아픈 역사를 바로 알고 기억해야 비로소 위로가 가능하고 내일을 말할 수 있다. 영화 '귀향'은 그런 위로를 위한 아픈 역사의 기록이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를 만난 정지용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정말로 부끄러운 거지."라는 말을 한다. '쉽게 쓰여진 시'처럼 늘 시를 쓰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화상'에서 우물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가엾게 여기며 자신을 되돌아보던 동주의 모습처럼,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본 적이 언제일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우리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살고 있는가, 개인의 작은 희망 한 조각을 꿈 꿀 수 있는 사회인가, 많은 물음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까? 어쩌면 영화를 보고 마음 한 구석이 무겁게 내려앉은 또 다른 이유는 그 물음에 대한 나의 부끄러움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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