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동리목월문학관 등 방문

 
 

지난달 29일 아침 6시도 채 안된 시각에 해남문화원 뒤뜰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어깨에는 제각기 가방을 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고단한 몸을 일으켜 세워 새벽잠을 설치면서 행여 늦을세라 가슴조이며 달려온 분도 있을 것이다.

문화원에서 경주문화유적답사 차 40명이 일행이 되어 버스1대를 전세 1박2일 코스로 해남을 출발하게 됐다. 이윽고 버스는 경주에 진입 가장먼저 탐방한 곳은 스케줄 그대로 손씨, 이씨 양대 문벌 동족집단을 이루었다는 양동마을이었다. 동방18현 중 한분인 회재 이언적 성리학자가 이곳 양동마을에서 태어났음이 이 마을을 더 돋보이게 한다.

양동마을의 특징은 예로부터 큰 인물이 끊이지 않고 그 수도 많다는 점과 15세기부터 1780년대 까지 창건된 가옥 3채가 보물로 지정돼 있고, 중요민속자료로 무려 13채나 지정돼 있음이고 유교사상이 짙은 마을이라는 해설사의 말이다.

다음 찾은 곳은 옥산서원 이 서원은 회재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산수가 빼어난 옥산마을에 1573년 창건했다. 사액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이 전국서원을 철패하고 47곳을 남겨둘 때 살아남은 서원으로 서쪽을 향하고 동, 서, 북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남쪽은 트여 있는데 뒤 산인 주산보다는 앞쪽의 무학산이 안산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외삼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작은 내가 흐르고 건너편 2층 무변루에 이르며 무변루를 마주보고 있는 강당은 '인(仁)을 구 한다'는 구인당이다.

강당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대청전면 '옥산서원' 편액은 이산해가 쓴 글씨고 '무변루'와 '구인당'편액은 석봉 한호 글씨인데 우리 대흥사에 걸린 간판 무량수각은 추사가.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는 원교 이광사가, 가허루는 창남 이삼만이 각각 썼고, 표충사는 정조대왕의 친필인데 당시 명필들을 한곳에서 감상 할 수 있는 공통점이 우리 일행과 일체감을 더해준다.

다음날은 원성왕릉을 거쳐서 동리목월문학관을 둘러보았다. 동리는 초기의 문학적인 특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낸 작품은 '무녀도'이고 광복직후에 제기했던 순수문학론, 본격문학론, 제3휴머니즘론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또 박목월은 한국시단에서 김소월과 김영랑을 잇는 시인으로서 향토적 서정을 민요가락에 담아 우리나라 시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문인이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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