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생 60년… 사진기술로 삼남매 키워
문내 새마을금고 설립해 초대이사장 지내

 
 

쑥죽 먹으며 갯벌서 놀던 기억 생생
예식장도 운영, 뒷바라지해준 고마운 아내

음력으로 1938년 9월 5일, 문내면 학동리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2년 늦게 올랐다. 5남2녀중 여섯째다. 형님 세 분과 누님 두 분 그리고 남동생이 있다. 큰형님은 8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박일초씨, 어머니는 김양금씨다.

남에게 얻어먹지 않을 정도로 살았다. 형님과 누님이 있었던 덕분인 것 같다. 보릿고개때는 조금 어려웠다. 그 시기에는 누님이 캐온 쑥에 꿔온 보리를 넣고 쑥죽을 끓여 먹었다. 꿔온 보리는 보릿세라고 불렀는데, 빌린 보리의 두 배를 갚아야 했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은 고구마줄기죽, 조상까리죽이라 불리는 걸 먹었다. 조상까리죽은 조의 껍데기를 한 번 벗겨낸 후 조와 껍데기를 함께 갈아 만든 죽이다. 바다에 나가 네모반듯한 뜰망으로 고기를 잡기도 했다. 배 끄트머리에서 뜰망을 담갔다가 시소처럼 건져냈다.

우수영초등학교와 영명중학교를 다녔다. 호적에 늦게 오른데다 키가 작아 9살에 입학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였다. 그래서인지 일본어는 학교 들어왔을 때 한두 번만 수업했다. 학생 수가 많아 교실은 콩나물시루 같았다. 학예회에서 매미 흉내를 내며 연극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여름이면 피섬바다 갯벌에 나가 놀았다. 오염이 없고 부드러운 찰진 뻘이었다. 짱뚱어처럼 온 몸으로 갯벌 미끄럼을 탔다. 문조리나 망둥이도 낚았다. 벼를 베고 나면 잘 마른 논두렁에서 공을 찼다. 변변한 공이 없어 지푸라기를 엮어 공을 만들었다. 나막신이나 고무신을 신던 때라 신발이 벗겨지지 않게 줄로 칭칭 동여매고 놀았다.

▲ 젊은시절 모습.
▲ 젊은시절 모습.

12살쯤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진도 방면에서 총소리가 많이 났다. 인민군과 교전이 있었다고 했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무서움보다는 신기함이 컸다. 부모님이 나가지 못하게 해 자세한 모습은 모른다. 인민군들이 산 속에서 훈련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중학교를 마칠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내 나이 17살이었다. 춘천 사는 둘째 형님에게로 갔다. 둘째 형님은 춘천 사범학교 시험을 치게 했다. 40명 중 15등을 했다. 하지만 큰 흥미가 없어 들어가지 않았다.

▲ 1964년경 별장사진관.
▲ 1964년경 별장사진관.

18살에 춘천에 있던 영광 사진관에 들어갔다. 자식이 없는 사장님의 아들노릇을 하며 사진 기술을 배웠다. 5년간 일을 배우다 해병대에 지원했다. 얼른 군대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제대날은 1964년 4월 30일이다. 제대하고 나니 아버지가 날 위해 소를 두 마리 기르고 계셨다. 한 마리를 팔아 문내면 고당리에 있던 사진관을 전세로 얻었다.

고당리에서 일하며 아내 정순엽(75)을 만났다. 기술 있는 사람이 밥 먹고 산다며 처남이 아내를 소개해준 덕분이다. 아내는 강강술래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예쁘고 성격도 활달해 홀딱 반했다. 27살에 만나 그 이듬해 겨울에 결혼했다.

자녀는 삼남매를 낳았다. 첫째는 아들 성철(51)인데, 경남 창원에서 대학을 다니고 그 곳에 정착했다. 둘째는 딸 지은(45), 셋째는 아들 상균(42)이다. 딸과 아들은 각각 서울과 인천에서 생활하고 있다. 일하느라 자녀들과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 아쉽지만 잘 자라줬다.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많이 고맙다.

▲ 부인과 나들이.
▲ 부인과 나들이.

결혼 후에는 진도에서 사진관을 열었다. 그때는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작업을 해야 해서 사진이 흔하지 않았고 인화 작업도 어려웠다. 젊은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때는 연인이 아니더라도 친한 사이면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결혼 전 독사진이나 선자리에 보내는 사진도 많이 찍었다.

사진을 찍을 때는 매번 웃으라고 말한다. 웃으며 찍은 사진이 보기에도 좋고, 추억도 오래 남는다. 사진 잘 찍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면 기분이 뿌듯하다. 본인과 닮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원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사진을 찍어줬다.

사진관에서 홀로 일하는 동안 아내는 학동리에서 아버지를 모셨다. 가끔 첫째를 업고 나를 만나러 왔다. 통통배를 타고 진도로 건너와서도 2km를 걸어야 사진관에 올 수 있었다. 그러다 학동리 집에 쌓아놓은 쌀을 도둑맞았다. 안되겠다 싶어 다시 학동리로 돌아왔다. 학동리에서 살며 근처 마을에 사진관을 열고 출퇴근했다.

남하리에서 사진관을 열었을 때 예식장도 시작했다. 그때는 진도 사람들이 결혼하기 위해 예식장을 많이 찾았다. 수많은 부부의 결혼식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1년 중 봄가을에만 25쌍의 결혼식을 올릴 정도였다. 1984년 동외리로 이사했을 때는 22명의 회원과 함께 문내 새마을금고를 설립해 초대이사장을 2002년까지 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마지막으로 이사한 7번째 별장 사진관이다. 예식장도 계속 운영했지만 해마다 손님이 줄어들었다. 1년에 한 쌍을 겨우 받다가 7년 전 폐업신고 했다. 사진관은 아직까지 노인들이 찾아온다. 특별하게 아픈 곳 없이 건강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

▲ 자녀들에게 보내는 안부
▲ 자녀들에게 보내는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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