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태(시인·조선대 초빙교수)

김 준 태(시인·조선대 초빙교수)
김 준 태(시인·조선대 초빙교수)
해남 대흥사는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영정과 유품을 모셔둔 표충사(表忠祠)와 서산대사 부도가 있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너무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선조 37년, 묘향산 원적암에서 세속 나이 85세 법랍 67세로 입적하시기 전에 대사께서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셨다. 부처님의 말씀을 적은 친필과 염주, 금란가사, 옥바리때 그릇 등을, 그 머나먼 묘향산에서 해남으로 옮기길 부탁했던 것이다. "내가 죽거든, 유품들을 조선의 남쪽 해남 대둔사에 가져다 모셔라. 대둔사는 삼재(물·불·바람 : 전쟁·전염병·기근)를 면할 수 있는 천하의 명당 사찰이니라"

평안남도 안주 태생으로 법명이 휴정, 당호가 청허당인 서산대사는 스물 한 살 때 지리산으로 출가해 스님이 된다.

이후 승과에 합격하여 교종판사와 선종판사까지 오른 휴정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5000여 승병을 이끌고 왜적들과 맞서 싸운다. 이때 대사와 최전선에 섰던 제자가 사명대사 유정이 아니던가.

2001년도 '8.15남북통일대축전' 때 북쪽 땅을 밟은 나는 묘향산 보현사도 들를 수 있었다. 임란 승병장 서산대사께서 41년을 도장으로 삼으셨던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 보현사. 화엄의 설법사로 알려진 보현보살의 법명을 따서 지어진 이 절은 8.15해방 전까지만 해도 31본사로 말사(末寺)만도 112개였던 한반도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런데 나의 눈길을 유난히 오래 끌었던 곳은 대웅전 왼편에 위치한 수충사(酬忠祠)였다. 이 건물은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셔두고 있었다.

아 수충사! 그렇다면 이 유적은 해남 대흥사 표충사와 분명 깊은 인연이 닿아 있는 곳이 아니던가.

법명이 백운(白雲)이라는 수충사 북한 스님께 "해남 대흥사를 아시느냐?"라고 물었더니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남북한 불자들도 서로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여 말했다.

"옛날에는 호국불교였으나 오늘날은 통일불교로 거듭나야 합니다. 죽기 전에 남쪽 해남 대흥사에 가보고 싶습니다" 수충사를 지키며 대흥사의 표충사도 익히 알고 계시는 백운스님께 나 또한 화답으로 시를 바쳤다.

시 제목은 [서산대사]였는데 2014년 갑오년 새해를 맞이한 고향 해남 대흥사에도 삼가 올려 바친다.

    어린 시절 해남 대흥사 표충사(表忠祠) 앞마당서 뵈었던 서산대사님이
 지금껏 돌아가시지 않고 묘향산 보현사 수충사(酬忠祠)에 살고 계셨다
 부처님께옵서 떨어뜨린 겨자씨 속에서 수미산 바람소리로 걸어나오더니
 6·25전쟁 때 폭탄세례를 받고도 살아남았다고 큰 소(牛)처럼 웃으신다
 통일되면 묘향산 겨자씨 속에 다시 들어가 쉬겠노라 빙긋 웃으시었는데
 정말이지, 님은 겨자씨 속에 수미산(須彌山)을 넣다 뺐다 하는 분이었다.

한편 2001년 8월 그 당시 북녘 땅 불교현황은 이러했다.

조선불교도연맹(1945년 12월에 발족한 불교도연맹의 후신)은 사찰 60여 개, 승려 3백여 명, 신도 1만여 명이었다. 승려인 경우 남쪽처럼 비구승·비구니가 없고 모두 결혼하여 식솔들을 거느린 대처승이다. 양강도 중흥사, 평양 광법사가 불교교육기관이다.

역시 북쪽에서 제일 큰 사찰은 보현사였으며 이 명찰을 품에 안은 묘향산은 1909m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북녘 하늘 드높이, 서산대사의 말씀처럼 "장엄하면서도 수려하게"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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