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천 (해남중 교사)

조원천 (해남중 교사)
조원천 (해남중 교사)
나는 중학교 2학년 역사를 가르친다. 요즘에는 조선시대 신분을 가르치면서 양반과 상민계층을 설명한다. 양반은 관료계층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상민은 농, 공, 상업에 종사하면서 생산을 담당했다. 관료도 중요하겠지만, 세금을 부담하고 나라를 지키던 생산계층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상민을 지칭하는 말은 상민 보다는 상놈(쌍놈?)이 되었다. 아예 욕이 된 것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아이들에게 질문하다가 옛날 일이 생각났다.

1980년대 말이니 지금으로부터 25년 쯤 전의 일이다. 시골에서 성장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하숙생활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같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내가 살았던 하숙집 주인 부부는 옛날 흥부가 살았다는 전라북도 남원의 산골짜기가 고향이었다.

농사만으로는 다섯 남매를 가르칠 수 없어 가산을 정리하여 전주에 전셋집을 얻고 아주머니가 10여 명의 학생과 직장인을 하숙 치셨다.

아저씨도 부지런한 분이었는데, 농사짓던 분이라 도시에서 일자리를 쉽게 구하지 못해 고생하시다 시청에 다니는 친척의 알선으로 청소 일을 하시게 됐다.

새벽 3~4시에 일을 나가서 하루 열두 시간 고된 노동의 대가로 받던 월급은 내가 받던 그것 보다 훨씬 적었다.

여름에도 파리, 모기들 때문에 짧은 소매의 작업복을 입지 못하던 아저씨의 온몸에 난 땀띠를 보면서 나는 내 월급이 부끄러웠다.

하루 여덟 시간 시원한 바람나오는 곳에서 노동하던 내가, 하루 열두 시간 팥죽 땀을 흘리며 노동하는 아저씨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미안했다.

대기업이나 당시 잘나가던 증권사에 다니는 친구들과 비교하며 선생월급이 적다고 불만이던 것이 창피했다.

내가 스스로 부끄러웠던 것처럼 아저씨도 스스로 부끄러워 하셨다. 자신이 청소노동자인 것을 부끄러워 하셨다.

막걸리 한 잔 하시면 마을 이장도 하고, 학교 육성회 임원도 하시던 시골 살림을 작파하고, 도시에서 청소 일을 하는 자신을 한탄하셨다.

나는 안타까웠지만 달리 위로해드릴 방법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당신의 아들이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대기업 사원이 되고, 경찰 공무원이 되었으니 고생에 대한 보답이 되었다고 편안하실까?

그 때의 고민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육체노동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

몸을 써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회사가 많은 이익을 냈으니 우리가 기여한 만큼 대가를 받겠다고 하면 이곳저곳에서 '고등학교 나온 노동자가 대기업 사원보다 더 받으려한다'고 훈계를 한다.

왜 고등학교 나온 노동자가 자신들의 노동의 결과로 나온 이익을 나누어 가지면 안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더 슬픈 것은 미래 세상의 주인이 될 우리 아이들이 이런 세상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 노동자의 권리 찾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노동하고픈 바램과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상해가며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 때문에 이사람 저사람 도움을 받아가며 헌법에 보장돼 있다는 노동자의 기본권을 행사하려 하면 회사의 온갖 탄압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전태일 열사가 자신을 불태우던 70년대의 초입이 아니라 선진조국이라는 201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엊그제 삼성서비스센터의 최종범이라는 노동자가 또 열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직도 노동자가 '배고파 못살겠다.'며 자결을 선택하는 세상에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내보내고 싶지 않아서 삼성전자서비스 앞의 피켓에 자꾸 눈이 간다.  

노동자가 상놈이 아니라 상민도 아니라 주인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세상에 우리 아이들을 내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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