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천(해남중 교사)

 
 
나는 전교조 조합원이다.

1988년 교직에 발을 들여놓은 후 이듬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될 때부터 나는 전교조 조합원이었다.

해고의 칼날이 힘없는 선생의 모가지를 위협해대던 전교조 창립초기에 조합원 신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한 가지 이유로 해직교사가 되어 4년 반 동안 학교를 떠나 있었지만 조합원 신분을 놓은 적은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교직생활 1년 반짜리 애송이 교사의 치기였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우리들은 권력의 시녀에서 벗어나 참교육을 하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했다.

1987년 교생실습을 나갔던 학교는 전두환 정권의 하수인과 다름없었다.

독재정권의 연장을 위한 4·13호헌조치의 당위성을 일방적으로 홍보하던 교무회의에서 교사들은 너무나 무력했다.

문제점을 지적하던 내게 말을 잇지 못하던 지도교사의 곤란한 표정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교사가 된 후 교육민주화에 관심을 가졌고 평교사 협의회를 거쳐 교직원 노동조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교조 결성을 전후해서 교직원 회의가 민주적인 의사 결정구조를 갖게 되었고, 돈을 받고 교사를 채용하던 사립학교의 관행이 없어졌다.

학생 자치모임이 활발해졌다. 전교조가 불법단체로 탄압받고 1500여 교사가 교단에서 강제적으로 내몰리면서 앞서 이뤘던 많은 것들이 되돌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애초 걸었던 길로 꿋꿋하게 나아갔다.

교단을 지키는 교사들과 연대하여 조직을 복원하고, 온 나라를 걸으면서 우리 의지를 밝혔으며 지역의 시민단체에 참여하여 풀뿌리 민주주의의 한 축이 되었다. 이런 바탕위에 1994년 해직교사들이 대부분 복직발령을 받고 1999년 마침내 합법단체가 되었다.

불법과 합법시대를 거쳤지만 우리의 지향은 변하지 않았다.

경쟁과 줄 세우기의 교육현실을 고발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전국의 모든 학교에 같은 시험을 봐서 줄을 세우는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문제점을 알려 마침내 올해부터 초등학교에서 일제고사가 사라졌다.

인권과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학교를 위해 노력했다. 학생의 모든 정보를 중앙에 집적하려 한 NEIS에 맞서 싸워 위원장이 해직되면서 정보의 중앙 집적을 막아내고 학생의 정보인권침해를 최소화 했다.

사립학교의 비민주성을 고발하고 민주적 운영을 위해 노력했다.

운영비의 90%내외를 정부보조 받으면서 제대로 된 감시를 받지 않아 설립자의 사욕을 채우는 사립학교들에서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다 해직된 교사들이 지금 정부가 전교조 설립취소의 근거로 삼고 있는 교사들이다.

학생들이 주인이 되는 학교를 위해 노력했다. 어린이날과 학생의 날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학생 동아리를 권장하며 학생 중심의 학교 축제를 만들어가는 현장에 항상 전교조 교사들이 있었다.

학생이 대상과 객체가 아니라 목적과 주체가 되어야 한다며 학생 인권선언을 주장한 사람들도 전교조 교사들이다.

그래서 나는 전교조 교사임이 자랑스럽다.

전교조 24년, 학교 현장은 처음 전교조가 주장한 것에서 한참 못 미친다. 경쟁 만능의 교육체제는 아직도 그대로이고 대학서열체제는 초등학교 교실까지 입시 교육에 물들게 하고 있다.

사립학교법은 보수정당의 반대에 부딪쳐 일찍 좌초되어 버렸고, 중·고등학교 일제고사는 지금도 해마다 시행되고 있다.

한 반에 40명 가까운 교실에서 학생 인권은 한가한 말씀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절절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며, 한편으로 전교조가 필요한 이유이다.

내가 교직을 그만 둘 때까지 나는 전교조조합원일 것이다. 바른 선생이 되려고 했던 교직 처음의 마음과 숱한 싸움을 해오며 가졌던 학생과 교직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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