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웅 스님(해남군장애인종합복지관 광장)
지웅 스님(해남군장애인종합복지관 광장)
무더웠던 여름이 가을에게 자리를 양보해주고 있다. 절집 백구가 지난 7월 무더위 속에 새끼를 낳았었다. 두 달을 넘긴 시점에서 여덟 마리 중 일곱 마리를 분양하고 어미인 백구와 매우 흡사한 한 마리만을 남겼다. 문득 어미백구와 새끼인 보리가 절집 뜨락에서 뛰어노는 것을 바라보니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두 사람이 기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인 사람 인(人). 이 단순한 글자 안에는 옛 부터 이웃끼리 서로 돕고 화합하는 것을 강조해온 선조들의 지혜가 오롯이 담겨 있다.

원시의 인류가 공동체를 형성하고 터를 닦아 정착한 이유는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넓고 거친 대자연은 언제 어디서나 나약한 사람들을 위협했을 것이며, 사나운 맹수의 공격과 매서운 비바람, 번개나 낙뢰 같은 자연피해를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사람들은 동굴 앞에 큰 돌을 놓거나 동물의 가죽을 움막 입구에 늘어뜨렸을 것이다. 안과 밖을 구별하고, 경계를 지어 외부를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공포의 감정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을 터이므로.

하지만 오늘날 현실은 더 이상 남을 믿고 의지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려워 보인다. 가장 가까운 친구나 가족, 이웃들로부터 범죄 피해를 당하고, 몸에 해로운 식품이 도처에 만연하는 등 다양한 불안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배우자 혹은 애인과 함께, 동료와 함께 어떠한 대상의 존재는 바뀔 수 있지만 살아가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늘 함께하게 된다. 사람은 혼자이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이기를 보편적으로 더 바라며, 그것이 더 안정적인 삶처럼 표현 된다. 혼자였던 백구가 늘 사람을 그리워하며 약수터에 오는 동네 사람들을 보며 짖거나, 산속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살아오다 새끼를 낳고 그 새끼에게 자연에서 살아가는 동물적 본능을 교육하고 같이 장난질하며 맘껏 뛰어놀며 예전과 달리 둘이 있어 즐겁고 행복한 듯이 말이다.

눈을 지긋이 감고 '하나가 아닌 둘'이란 말을 떠올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너그러워짐을 느끼게 된다. 쳇바퀴 돌 듯 바쁜 일상이지만 시원한 심호흡을 하게 된다. 하나가 아닌 둘은 너그러움이다. 바로 너그러움이 주는 편안함 인 것이다. 욕심과 사심이 들어간 것은 진정한 '둘'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이유로 '둘'이라는 삶을 뒤로 한다. 앞으로 달리기만하면 내가 달려온 길과 주위를 보고 느낄 수 없다.

어느 날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달리던 길을 멈춰 서게 될 때는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치고 쇠약해진 후가 된다. 나의 의지로 멈춰 설 수 있는 지금 잠시 주위를 둘러보자. 그리고 나와 내 이웃을 둘러보자. 그리고 몸으로 움직여보자. 이러한 작은 변화가 내 안에 큰 기쁨과 자비로 채워지게 된다.

앞으로 나가는 것이 목적이 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사는지 모른다. 발전과 경쟁으로 요약되는 현대사회에서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숨을 한번 고르라고 말해주고 싶다. 앞으로만 달려가던 빠른 걸음을 멈추고 잠시 뒤를 돌아보며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새로운 힘을 얻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100년을 산다고 해도 지혜가 없고 사악하고 위선으로 산다면 하루를 살아도 오롯한 마음으로 바른 지혜를 배우는 것만 못하다네 - (법구경)

위 구절처럼 하루를 살더라도 바른 지혜를 터득하여 나+너=행복!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이름'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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