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헌(언론인 (사)우리글진흥원 대표)

유명한, 박 대통령도 즐겨 읽었다는, 중국 철학자 펑유란(馮友蘭)의 저서 '중국철학사'는 중국(철학)의 배경을 그리스와 같은 해양국과 대조되는 대륙국으로 설명했다. 공자와 맹자를 예로 들었다.

'공자 말씀'인 '논어'에는 바다에 대한 말이 한 번밖에 없다. "이 세상에 도(道)가 실현되지 않으면 (나는)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겠다"(道不行[도불행] 乘?浮於海[승부부어해]) 그에게 바다는 '가서는 아니 되는 곳'이었다.

맹자의 바다 얘기도 드물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다른 물을 생각하기 어렵고(故觀於海者[고관어해자] 難爲水[난위수]) 성인의 문하를 노닐던 사람은 남의 말 생각하기 어렵다.(遊於聖人之門者[유어성인지문자] 難爲言[난위언])"는 이 말은 공자보다는 덜 부정적이었으되, 바다의 본디를 이른 것은 아니었다. '크기'에 관한 비유로 바다를 이용한 것이었다.

진진포포(津津浦浦)로 세상 이곳저곳이란 뜻을 삼은 일본은 마치 그리스 같은 해양국이다. 왜구 등살에 선조들 고생 막심했던 까닭이다.

동네방네 골짝골짝, 방방곡곡은 중국처럼 대륙국의 성격으로 살았던 우리 전통이 스민 언어다. 방방곡곡에 진진포포를 섞은 방방포포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고 글 쓴 적이 있다.

해남은 '해양국'인가, '대륙국'인가? 땅끝은 우리 삶의 바탕을 육지로 본 결과다. 큰 바다의 시발점이라는 뜻이 희석돼버린 말이다. 언어는 이렇게 역사를 담는다.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의 모양을 바꿔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크고 좋은 항구가 없다 뿐이지, 해남은 길고 긴 해안선과 풍부한 생명을 보듬은 바다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거의 농사로만 물산이나 정신적 자원을 키웠다. 예로부터 유명한 김(해우)은 바다에서 왔지만, 실은 이것도 농사와 비슷한 개념의 물산이다.

완도가 건너다보이는 이진포구에는 화산돌이 엄청나게 많았다. 가무잡잡하고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린 이 돌이 제주도에서 왔다는 것을 향토사학자였던 큰아버지 고 강경식 님에게서 어렸을 적에 들었다. 최근 가보니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제주도를 왕래하던 중요한 포구였다.

빈 배의 아래에 실어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하던 돌이었다. 위대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도와 바람 앞 촛불 같던 나라를 구한 해남사람들의 바다를 향한 의로운 디딤돌이기도 했던 곳이다. '해양국'으로서의 그런 역할마저 근세 이후 스러져버린 것이다. 이름으로만 남았다.

해남은 바다에 걸터앉은 대륙국 모양이다. 크게 봐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 대륙국 성격의 농업은, 우리나라는 물론 장차 동아시아까지 먹여 살릴 식량 생산의 터전일 것이어서 흡족하긴 하다. 그러나 해남의 또 하나의 큰 자원, '해양국'으로서의 잠재력은 아직 칼집 안의 칼이요, 비 기다리는 대밭의 죽순이다.

뿌리와 가지 끝이라는 본말, 산업적으로는 고대에 농사와 장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농사는 귀한 본디이고, 교역은 지엽 말단 즉 중요하지 않은 것이란 뜻 품었다. 그러나 이 말을 달리 해석해보면 어쩌면 본디보다 지엽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봉건 지배자 입장에서는, 농민은 농토 등 생산요소의 특성 때문에 쉽게 이동할 수 없어 배반을 '때리기' 어렵다.

장사하는 이들은 재산이 들고튀기 간편하여 쉽게 지배자를 등진다. 순박한 농민이 예쁠 수밖에 없었다. 상인은 교활하고 이기적이다. 역사 흐르며 본말은 수도 없이 뒤집혔다. 본말전도다. 농사만큼, 아니 더, 상업도 중요하다.

충무공과 조상들이 앞바다 울돌목에서 쓰셨던 그 배 13척만큼 큰 재산, 바다를 여태 보듬고(만) 사는 바다남쪽의 사람들을 생각한다. 저 바다에도 우리의 미래는 출렁거린다.

나직하게 불러본다, 마음 속 내 마을의 이름을. "우리 해남은요, 참 좋은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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