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시인 생전 모습.
▲김남주 시인 생전 모습.

설날 아침을 앞두고 읊어 보는 김남주 시인의 ‘설날 아침에’라는 시이다. 설맞이 시지만 그 안에는 평생 유신과 독재에 맞서 싸우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의 상처와 암울하기만 한 농촌 현실이 담겨있다. ‘허물어진 장독대’,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 게다가 마을에는 ‘때때옷’도 ‘색동저고리’도 없다. 어려운 현실에도 그는 동생을 챙긴다. 나이 마흔에 장가 못 간 아우가 얼른 장가를 갔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까치가 사랑의 노래를 남겨주길 바랐다. 그것은 아우뿐만 아니라 농촌, 나아가 나라 전체에 대한 그의 희망이요,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시를 쓰고 3년 뒤 인 1994년 췌장암으로 생을 달리한다. 30년이 지난 지금 설날 아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는 혁명과 저항의 상징이었다

김남주 시인은 1945년 삼산면 봉학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72년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신문을 제작했다. 1973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돼 8개월 만에 출소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러나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해 활동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감옥에 수감됐다. 유신체제를 비판하기 위한 단체였지만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됐다. 수감 중에 감옥에서 우유팩이나 화장지에 이쑤시개나 칫솔, 손톱을 이용해 민족과 통일을 위한 시를 썼고 교도관과 면회객을 통해 감옥 밖으로 전해져 1984년 첫 시집인 ‘진혼가’가 발간됐다. 그가 남긴 510편의 시 중 360편이 옥중에서 씌어졌다.

▲생가에 있는 시인의 흉상이 변색돼 있다.
▲생가에 있는 시인의 흉상이 변색돼 있다.

국내외 지속적인 구명운동으로 1988년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됐다. 이후 활발한 문학 활동과 사회참여 활동을 병행했지만 수감에 따른 후유증과 과로로 췌장암이 발생해 끝내 1994년 2월 13일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됐다.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그래서 시인이기 이전에 전사요 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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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시인의 동생인 김덕종 씨.


연 만들고 같이 놀았던 ‘우리 형’  

삼산면 봉학마을에 있는 김남주 생가에서 만난 김남주 시인의 동생 김덕종 씨는 30주기를 묻는 질문에 “눈에 선하고 그립고 보고싶다. 머리에서 지울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고 말했다. 김남주 시인이 투병 후 눈을 감는 순간까지 석달 동안 덕종 씨도 병원에서 간병을 했다. 그에게 형은 여느 형과 다를 바 없었다. 10대 때 설날에는 손재주가 좋은 형이 마을에서 가장 크게 연을 만들고 마을에서 가장 높은 오동나무 인근에서 가장 멀리 연을 날렸다고 한다. 덕종 씨는 형의 시가 면도칼처럼 예리하고 무서울 정도였다며 그런 그의 정신이 잊혀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덕종 씨는 “386세대와 민주화세력의 동경을 받았지만 이후 세대나 소위 MZ세대에는 잊혀져가고 모르는 존재가 됐다”며 “어지럽고 더러운 세상을 바꿔 새 세상을 만들려 한 투사였지만 지금은 그런 저항과 혁명정신은 가려진 채 단순한 문학인으로 기억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남주 시인이 감옥에서 편지에 시와 함께 해석까지 달아 보낸 ‘사랑은’이라는 시는 김덕종 씨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김덕종 씨는 “나무를 심는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시골 노인이 집 뜰에다가 감나무 심을 때는 자기 때 맛보려는 게 아니고 후손들이 달콤한 맛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다”며 “70~80년대 새 세상을 위해 그가 계속 싸워야 했던 이유는 새 세상이 당장 오지 않더라도 후손들이 그 새 세상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형이 바라던 새 세상이 지금 온 것인지 세상에 되물었다.
 

▲김남주 시인 생가 모습. 
▲김남주 시인 생가 모습. 
▲김남주 시인 생가에 시인의 시를 담은 철판이 전시돼 있지만 녹이 슨 상태이다.
▲김남주 시인 생가에 시인의 시를 담은 철판이 전시돼 있지만 녹이 슨 상태이다.


휑하기만 한 생가, 깊은 고민 필요

지난 3일 방문한 김남주 생가는 휑하기만 했다. 입구에 있는 가로등은 깨져있고 그의 흉상도 변색됐다. 그의 시가 담긴 철판과 표지석은 녹이 슬고 글자가 지워져 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게스트하우스도 운영되고 있지만 찾는 사람은 한 달에 한두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가 그리워하고 외쳐오던 김남주, 그의 생가의 현 주소이다.

김남주 기념관은 지난 2019년 모교인 전남대학교에 건립돼 운영되고 있다. 그의 시가 벽에 새겨져 있고 화장지 등에 옥중에서 쓴 시도 원본으로 전시되고 있다. 시인의 육성과 각종 영상도 볼 수 있다. 20여 년 전 해남에서도 김남주 기념관 건립 얘기가 나왔지만 결국 흐지부지됐다. 김남주 생가를 생가답게 보존하고 나아가 김남주 정신을 기리기 위한 민과 문학인들의 더 큰 노력과 함께 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김남주 시인 30주기 추모식은 오는 17일 오전 11시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된다. 김남주기념사업회(회장 김경윤 시인)와 광주전남 작가회의가 함께 주최한다. 해남에서는 해마다 가을에 그를 기리는 학술대회와 추모문화제를 열고 있다.

 

설날 아침에 

눈이 내린다 싸락눈
소록소록 밤새도록 내린다
뿌리뽑혀 이제는
바싹 마른 댓잎 위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린다
더러는 마른자리 골라 눈은
떡가루처럼 하얗게 쌓이기도 하고

닭이 울고 날이 새고
설날 아침이다
새해 새아침 아침이라 그런지
까치도 한두 마리 잊지 않고 찾아와
대추나무 위에서 운다

까치야 까치야 뭐하러 왔냐
때때옷도 없고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 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
좋은 소식 가지고 왔거들랑 까치야
돈이며 명예 같은 것은
그런 것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죄다 주고
나이 마흔에 시집올 처녀를 구하지 못하는
우리 아우 덕종이한테는
행여 주눅이 들지 않도록
사랑의 노래나 하나 남겨두고 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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