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원 해남등대원장

초등학교 1학년 어느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집에 왔는데, 아버지께서 바람이 통하는 길목에 그늘막을 쳐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더운 날 친구들과 시원하게 공기놀이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친구들 불러다가 시원하게 놀아라.” 아직도 어린 그 날의 뜨거웠던 온도와 이마에 스치던 바람, 하얀 이빨을 환히 드러내시던 아버지의 미소가 잊히지 않아 힘들 때마다 지탱해 주는 힘이 돼준다. 

수많은 아이를 양육하면서 늘 마음을 쓰는 것이 있다. 첫 번째는 아이들에게 행복한 경험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줘 힘든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추억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되게 해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가장 예민한 십 대 시절에 조건 없이 받는 사랑을 통해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도록 하는 것이다. 

해남시니어클럽에서 네 분의 어르신이 일자리 사업으로 등대원에 오신다. 아이들을 바라봐 주시는 그 눈빛이 참 따스해서 감사하다. 한 아이의 돌잔치가 있었을 때 쌈짓돈을 모아 복 돈으로 주시는가 하면, 김장했다면서 아이들 맛보라고 김장 김치도 나눠주셨다. 아이들 헤어스타일이 바뀌면 바로 알아보고 관심을 보이신다. 지역의 어른들이 이런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봐 주신다는 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 모른다. 아이들이 ‘고향’하면 떠오르는 따뜻한 기억과 부드러운 느낌 그리고 고향의 음식들은 두고두고 힘들 때마다 살아갈 버팀목이 돼 줄 것이다. 

시대가 달라졌고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보내는 사랑과 지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힘을 준다. 좀 더 살만한 세상으로 만든다. 그 살만한 세상이 우리 아이들의 고향인 이곳 해남에서 출발하길 바란다.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아이들에게 본이 돼주는 어른이 참된 어른일 것이다. “아이가 말을 안 들어요”, “아이가 매사에 짜증을 부려요”라는 고충을 들을 때가 있다. 아이들을 지도하고 훈육할 때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영향을 끼치고자 입을 여는 순간 어른이 아닌 꼰대가 돼버린다. 그저 아이의 이름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한 번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훈육의 효과는 충분할 것이다. 

방학이라 온종일 아이들의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다투기도 하고 금세 웃기도 한다. 소리 지르며 경쟁도 하고, 아이들은 하루하루 성장해 나간다. 그 누구 하나 존귀하지 않은 아이는 없다. 이번에 대학에 입학하는 아이가 그동안 도움을 주셨던 후원자께 쓴 편지를 소개할까 한다. 

‘…(중략) 등대원은 제19년 인생 중 가장 추웠던 시기에 저에게 봄처럼 다가와 꽃처럼 대해줬습니다. 많이 밟힌 여정이었고,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한 시선이었지만 등대원을 만남으로 저를 새롭게 만났습니다. 또한 인생이 추울 때 후원자님을 만나 저를 꽃으로 대해주신 따뜻한 마음들을 마음 한켠에 곱게 모아 두었습니다. 이 마음들을 소중히 한데 모아 저는 간호사가 되어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결심하였습니다.…(중략) 이제는 20살이 되어 등대원에서 자립할 준비를 차근차근해야 합니다. 제 인생의 봄이 떠나가 어쩌면 다시 눈이 내릴지도 아니면 새로운 봄이 다가올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어쨌든 저는 타인에게 봄이 될 수 있도록 계속 걸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디까지 걸어야 끝이 날 줄도 알 수 없고, 가끔 시간과 마음의 방향이 어긋날 수도 있지만 저는 뒤를 돌아 제가 걸어온 발자국과 그 옆에 예쁘게 찍혀있는, 이미 후원자님이 걸어가신 길을 보며 걸어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략).  

아이들은 방학 내내 주어진 여유로움을 즐길 것이다. 또 설렘과 두려움으로 신학기를 준비할 것이다. 어른들도 새로운 환경이 바뀌면 불안한 것처럼 아이들도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에 말없이 함께 손잡아 줄 넉넉한 어른이 주변에 많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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