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주요경력)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동북아센터장,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원장, 한국냉전학회 회장, 비판사회학회 회장, 한국사회사학회 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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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우리 집에서는 12월 중순에 김장을 했다. 재료는 해남 절임배추였다. 속이 꽉 차고 단단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늘 이것을 선택했다. 배추를 잘 씻어 다진 양념을 넣고 손으로 잘 버무린 뒤 가운데 한 잎을 뚝 떼어 입에 넣어주고 간이 맞는가를 물었다. 맛있다고 하면 그때서야 허리를 쭈욱 펴고, 김치통에 담으면서 이제 겨울걱정은 없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김치냉장고가 커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해 첫날에는 막 꺼낸 김치가 식탁에 올랐다. 뜨거운 떡국에 아삭거리는 김치는 일품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배추의 주산지는 원래 개성과 서울 부근이었고, 여기에서 100여 년 전에 오늘날과 같이 속이 통통한 결구배추가 개발되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배추는 대부분 가을배추이지만, 해남이 한국 배추의 주산지가 된 것은 겨울배추가 대중화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에서 개발된 겨울배추는 해남에서 제 자리를 찾았다. 전국 배추 생산량에서 해남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을배추의 경우 약 17%이지만, 겨울배추는 50%를 넘는다. 약 600여 농가가 이를 재배하는데, 이들이 지역경제의 상당 부분을 떠받치고 있다.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음식은 건강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웃 일본이나 중국의 음식들과 비교하면 맛의 비결이 사뭇 다르다. 한국의 맛은 손맛이다. 어머니들의 손맛은 오랜 경험과 정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한국음식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한국음식과 자주 비견되는 것이 일본음식인데, 이를 상징하는 것은 칼맛이라는 속설이 있다. 홋카이도 오타루 항이나 삿포로 시내에서 눈 내리는 저녁에 먹는 생선회는 유독 맛이 있는데 이는 날카로운 칼맛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음식은 어떤가? 땅이 매우 넓고 요리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바로 이거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최근 10년간 방송된 우리 나라의 텔레비전 먹방 프로그램을 분석해보면, 불맛이 적절한 답이 될 수 있다. 불맛은 최근에 급속하게 관심을 끌게 된 것이지만, 나는 중국의 창사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불맛에 관한 그림설명을 보면서 이런 주장이 나름대로 근거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곳은 후난(湖南)요리로 유명한 식당으로 16세기에 지어진 불의 궁전(火宮殿)바로 옆에 있는데, 이 식당의 벽에는 중국의 전통적인 조리방법으로 유작(油炸)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작(炸)은 불(火)과 잠깐(乍)의 합성어로 불맛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글자이다. 불맛은 식재료가 고온의 불꽃에 직접 닿았을 때 그 부분이 살짝 타면서 요리에 스며드는 독특한 풍미로, 1912년 프랑스의 의사 겸 화학자 루이 카미유 마이야르(Louis Camille Maillard)가 1912년 발견해 공표한 화학 반응의 산물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식당 입구에는 모택동의 상이 서 있는데, 이는 1958년 4월 모택동이 이곳을 방문하여 취두부를 먹었던 사실을 기념하여 2008년에 세운 것이다. 정치적 아이콘이었던 모택동 상이 시대가 바뀌어 호남요리를 홍보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나는 김치 중에서도 국물이 촉촉하게 배어나오는 백김치를 좋아했다. 내가 종종 그것이 먹고 싶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기꺼이 맛있는 배추 한두 포기를 사오라고 했고, 이것을 깨끗하게 다듬은 후에 배와 청각을 넣고, 또 거기에 실고추와 얇게 썬 대추로 색깔을 입힌 다음, 마지막으로 귀한 잣 몇 톨을 넣어 백김치를 담갔다. 그 시원한 맛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요양원에서 생활하신지 벌써 8년째로 접어드는 새해 첫날, 어머니의 손맛이 더욱 그리워진다. 다시 한 해의 건강과 평안함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봄기운이 들면 땅끝, 미황사 대웅전 돌기둥을 기어오르는 게와 거북이라도 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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