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순 (교사)

몇 해 전에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서울에서 외손녀를 돌보는 선배를 만났다. 딸 부부는 모두 잘나가는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으나 퇴근 시간은 매일 밤 10시가 넘는 까닭에 딸 부부가 퇴근하는 시간에는 이미 손녀는 잠들어서 자식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했다. 부모가 큰돈 안 보태주고 집칸이라도 장만해 사는 것이 대견해 조금이라도 살림에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선배 부부는 연금 전부를 딸네 집 살림에 보태고, 육아를 도맡아 하고 있다.

게다가 하루는 얼마나 바쁜지 아침에 일어나 딸 부부 출근시키고, 초등학교 1학년 손녀딸 밥 먹여 차 태워 학교 보내고 돌아와서 부부는 늦은 아침을 먹는단다. 식사 후 청소, 빨래, 설거지를 하고 오후 2시쯤 아이 하교를 챙기려 부랴부랴 집을 나서야 한다. 아이가 학교 급식이 입에 안 맞아 배가 고플 것에 대비하여 챙겨온 간식을 차에서 먹이고, 영어학원 교실까지 손잡고 데려다준단다.

영어학원에 머무는 시간이 제법 많아 이 시간에 마트나 장을 보거나 하지만 마음이 한가한 것은 아니다. 4시쯤에는 아이의 체력을 기르고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태권도 학원으로 이동시키고, 6시쯤에는 테니스 학원을 보내기도 하고, 각종 놀이 학원을 번갈아 가며 보낸단다.

아이가 하루 일정을 다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은 오후 7시 30분, 집에 오자마자 밥을 먹이고 저녁 숙제를 봐줘야 한단다. 영어학원 숙제는 집에서 일절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생전 써보지 않은 영어 흉내를 내야 하는 것이 괴롭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살 수 있단다. 이외에도 받아쓰기, 구구단 외우기, 책 읽어주기 등 숙제가 끝도 없이 많단다. 아이는 힘들다고 자꾸 딴전을 피우는데 화내지 않고 숙제를 할 수 있도록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에게 온갖 재롱과 협박을 하고 나면 밤 10시가 다 된다고 했다.

어느 날 딸이 오후 7시쯤 퇴근한 적이 있어 딸 부부와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눴단다.

"아야, 00이 너무 힘들지 않겄냐? 천천히 가면 안 되겄냐? 학원 하나라도 줄이고 좀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게 하자."

"엄마! 엄마가 나 키운 것처럼 대충 키워서는 요즘 애들 축에도 못 낀다고요."

이런 부모라도 둔 자식들은 육아 부담을 부모에게라도 맡긴다지만 이 땅의 대부분 젊은이가 어떻게 육아를 꿈이라도 꾸겠는가? 결혼도, 출산도 마다하는 현실은 14세기에 창궐한 페스트 전염병보다 인구 절감이 심각하다고 한다. 헌데 노동 정책은 69시간이네, 62시간이네 하며 늘려야 한다고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가 하면, 부모가 늦게까지 일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저녁 늦게까지 돌봄을 하겠다고 정부는 호언장담한다.

그렇잖아도 선진국 중 노동시간 1위인 국가, 아이들이 부모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노동 현실에는 눈감고, 오히려 더 일을 시키기 위해 학교에서 육아 돌봄을 하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저출산 대책인가? 사람살이가 가능한 대책 없이, 아무리 출산 장려 정책을 내놓고, 땜빵 예산을 쏟아부어도 젊은이들은 눈도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삶의 여유를 가지고 즐길 수 있는 '워라벨'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이미 세계는 주 4일제 근무가 현실화하고 있다. 정보화, 디지털화 시대의 결과는 모두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저녁에 야근하지 않고 자녀와 눈 마주하며 안심하고 키울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줄이고, 초과근무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도록 임금을 현실화하는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부정과 부패, 꼼수와 권모술수가 성공의 지름길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더 대접받는 정의로운 사회가 필요하다. 나만 1등 해서 성공하겠다고 어려서부터 놀이 하나도 즐기지 못하고, 사교육에 매달리는 아이가 어떻게 성장해서 모두가 안전하고 평화롭고 지속가능하게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고 경영하겠는가? 매일 뉴스에서 그런 자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