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순 (교사)

어느 퇴근길 아파트 마트 앞에서 있었던 일이다. 마트 앞에는 저녁거리를 장만하기 위한 주부들의 차량들로 수십 미터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간대는 도로 3차선이 모두 주차장이 되기 일쑤다. 나도 저녁거리를 구입해야 하는 터라 주춤거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빠져나갔다. 눈치를 보거나 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 공간에 내 차를 들이밀고 마트로 달려가 장을 보고 나왔다. 그런데 주변 차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내 차만 횡단보도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하이고, 저것이 뭔 모양새다냐. 남사스럽게."

허겁지겁 차로 달려가는데 횡단보도 시작하는 곳에 40대가 아직 안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내 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고, 미안해요. 급하게 주차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여기가 주차하는 곳인가요? 횡단보도입니다, 횡단보도!"

얼굴이 달아올라 화끈거린 채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과를 했다.

"그러게 미안해요."

"다음에는 그러지 마세요. 아무튼 경찰에 신고했으니 연락갈 겁니다."하면서 쌩하고 돌아서서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주차를 한 것도, 얻어들은 것도, 경찰이 연락할 거란 것 모두 창피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하고 뭔지 억울하기도 했다. 멀쩡한 횡단보도에 턱하니 주차한 무식한 아줌마가 아니고, 바쁜 김에 도열해있던 차량 중에 겨우 끼어 잠시 주차했던 그 상황을 되짚어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한숨을 내쉬며 저 젊은이가 누구일까 생각했다. 당돌하기도 하지만, 개인주의 사회에서 쉽지 않은 젊은이임에 틀림 없었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새 아파트로 이루어진 이 마을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횡단보도에 도발적으로 주차된 차를 보고 가만히 지나가지는 않았으리라.

이 마을은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30, 40대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이 유독 많은 아파트 단지이다.

입주부터 젊은 입주민들은 온라인 카페를 만들고, 활발하게 아파트를 만들어갔다. 아파트가 완공되는 단계에 끊임없이 의견을 개진하고, 값싼 청소업체, 실내 디자인 업체들의 정보에서 아파트 사용 꿀팁까지 대량 방출하며 마을을 만들어갔다.

업체가 부여한 아파트 명칭을 협의를 통해 바꾼다거나, 주민 대표를 뽑는데 후보자들이 가가호호 방문하며 자신의 입장을 설파하여 모두가 인정하는 대표로 뽑힌다거나 아파트 소식을 벽보에 정기적으로 올렸다. 보통 중년 이상의 동대표들만 봐왔는데 이들은 모두 30, 4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다. 단지 내에 공동 육아 시설이나, 공공 어린이집도 유치하여 널리 홍보했다. 어린이에게 안전하지 않은 곳이나, 활동을 조심시키는 홍보나 캠페인도 종종 펼쳤다.

아파트를 관리실에서만 관리한다고 생각했던 통념을 깨고 이들 젊은이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운영하였고, 정기적으로 지자체의 공모사업을 통해 여러 공동체 활동을 기획하고 운영하였다. 모두 직장인인 까닭에 시간을 쪼개는 게 쉽지 않음에도 아파트 공동 경영은 거짓말처럼 계속 운영되고 있다.

모두가 주인이 되어 '정원에 꽃 심기의 날, 공동 청소하는 날, 눈 치우는 날, 연못에 물고기 방생하는 날, 겨울철에는 방생했던 물고기 가정에 분양하는 날, 어린이날 잔치,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핼로인 축제, 공동 크리스마스 트리 만드는 날, 각 가정에 꽃 화분 나눔의 날, 대형화분을 이용한 텃밭 분양과 공동 농사짓기, 도서실 운영, 아나바다 장터 운영 등 이루 셀 수 없는 마을 공동체 행사를 끊임없이 진행했다. 기특하고 고마웠다.

평소에 공동체 주민자치를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나는 이 공동체 속에서 껍데기였다. 나이가 많아서, 젊은이들이 잘하니까, 바빠서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얹혀가는 마음으로 응원만 하는 소극적인 마을 주민이다. 돌이켜 나를 꾸짖었던 그 젊은이도 일행이려니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며 마음 든든해진다. 젊은이들이 만든 이 아름다운 공동체에서 오래된 미래가 보인다. 고맙고, 기대되고 든든하다. 청년들이 만들 우리의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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