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경 (전 광주일보 편집부국장)

잔잔할 것으로 보이던 선거판에 '초대형 고래'가 출현했다. 내년 4월 10일 치러지는 제22대 총선 해남·완도·진도 선거구 전초전에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전격 등판해 불어닥친 돌풍을 이르는 말이다.

'거물'의 등장은 단숨에 판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애초 선거 구도는 더불어민주당 윤재갑 현 의원에 복수 입지자들이 도전해 윤 의원의 재선 여부가 관심사였다. 하지만 진도 출신 박 전 원장이 '수구초심'(首丘初心)을 기치로 출마를 선언하면서 해남·완도·진도는 단숨에 전국적인 관심 선거구로 떠올랐다.

우선 박 전 원장의 이름값에 걸맞게 초반부터 쏠림현상이 형성됐다. 지난 9월 광주방송(KBC)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 전 원장에 대한 지지세가 압도적이다.

해남, 완도, 진도군 거주 유권자 500명을 대상으로 '내년 총선 출마자로 거론되는 후보군에서 가장 선호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박 전 원장이 47.1%로 선두를 달렸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 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당시 조사는 일부 입지자가 빠진 상태로 이뤄졌지만, 선거판은 일단 박 전 원장에게 크게 기울어진 채 출발했다.

이 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박 전 원장이 해남(40.8%), 완도(48.2%), 진도(59.4%)에서 모두 가장 높은 선호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우선 진도는 고향이어서 그렇더라도 해남, 완도에서도 지지세가 강한 것은 전국적 인지도에다 지역 특성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진도는 지난 9대 총선부터 유권자가 거의 두 배인 해남과 통합선거구로 묶인 이후 중선거구제였던 12대 때 정시채 전 의원 말고는 13대 소선거구제 환원 이후 40년 가깝도록 지역구 당선자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이런 갈망이 박 전 원장에게 쏠린 것으로 해석된다. 해남의 경우 지역 정치권의 갈등에다, 과거 민주평화당(민평당)-민생당 시절 박 전 원장과 함께 뛰었던 인연이 물밑 교감을 이루며 지지세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18대 총선부터 같은 선거구로 묶인 완도는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김영록 후보(완도·현 전남지사)와 해남 출신 민화식 후보 대결 이후 해남 경원 현상이 생겨 박 전 원장의 반사적 지지세가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고향에 대한 마지막 봉사를 명분으로 들고나온 박 전 원장의 선택은 함축적으로 보인다. 우선 몰표를 기대하는 진도를 베이스캠프로 삼고, 해남의 저변을 확보하면서 완도 유권자 성향을 활용한다면 5선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표 계산을 했을 법하다.

또한, 그의 선택은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꿰찰 수 있는 카드로 여겨진다. 그는 14대 전국구를 필두로 목포에서 내리 3선(18대 무소속, 19대 민주통합당, 20대 국민의당)을 지냈다. 따라서 첫 출장인 해남·완도·진도를 택함으로써 공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동일지역구 다선 중진 배제'라는 시한폭탄을 피하는 동시에 당선 가능성을 높이는 양수겸장의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그렇더라도 정치는 '생물'인 만큼 결과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아직 민주당 세부 공천방식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고, 김포시의 서울 통합 추진을 발판으로 영남 중진을 수도권으로 차출하려는 국민의힘 총선전략이 민주당에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도 미지수다.

결국, 박 전 원장과 '비박' 입지자들이 선거일까지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가 관건이다. 박 전 원장은 관록과 경륜을 바탕으로 민생을 보듬고 자활을 실현할 수 있는 추진력과 함께 거물다운 품격을 함께 보여주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만에 하나 화려한 이력을 내세워 선거운동 단계부터 '상왕'으로 군림하려 했다가는 거센 역풍에 직면할 수도 있다.

다른 입지자들 또한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고래'에게 그대로 먹힐 수밖에 없다. 아직 몇몇 '변수'가 남아 있는 만큼, 사생결단의 패기와 열정으로 비전을 제시하며 유권자에게 다가가 스스로 활로를 열어야 한다.

지역 유권자 역시 바람에 휩쓸리지 말고 현명한 선택을 통해 선거판을 지역 정치의 격을 높이는 계기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박 전 원장이 몰고 온 '고래 효과'가 사나운 태풍이 돼 휩쓸고 지나갈지, 정치 수준을 높이는 기폭제가 될지는 결국 주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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