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경(전 광주일보 편집부국장)

중장년이라면 학창 시절, 몇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주번 완장'을 어깨에 두른 적이 있을 것이다. 대부분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인 '주번' 완장을 차면 할 일이 꽤 많다. 교실의 주전자에 수시로 물을 채워야 하고, 컵도 깨끗하게 씻어 두어야 한다.

체육 시간에는 급우들의 소지품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교실에 혼자 남아 유유자적을 맛보기도 한다. 주번 완장에는 애증이 묻어 있었다. 등하교에 수업 듣기도 빠듯한데 주번이 돌아와 1주일 내내 잡일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토요일 4교시를 마치고 완장을 벗고 나면 홀가분하면서도 왠지 모를 허전함에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주번이 돌아오면 바쁘면서도 생기가 도는 듯했다. 청소 감독을 하면서 급우들이 혹여 자기 이름이 적힐까 봐 호의적으로 보내는 눈길의 달콤 미묘함도 맛보았으리라…. 완장의 '마력'이었다.

때때로 완장은 사고를 치기도 했다. 주번 권한을 확대해석한 나머지 덩치 큰 일부는 교실에서 소란 피우는 급우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청소 시간에 으슥한 곳에서 동전 치기를 하는 애들을 발견하면 선생님에게 이르는 대신, 하교 시간 교문 앞 풀 빵집에서 '거래'를 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다.

주번 완장은 성인 사회로 가면서 '권력'으로 진화한다. 선출직 공직자들에게 주어지는 공무상 권한이 바로 완장이다.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지방단체장, 지방의원, 농축수산협동조합 조합장 등등 학교 주번보다 수백 배 힘이 센 완장은 지금도 존재한다.

이들 역시 학창 시절 못된 주번과 마찬가지로 가끔 물의를 일으키곤 한다. 완장은 왜 '탈선'과 항상 동침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권력의 속성과 맞물려 있다. 권력에는 '선민의식'과 '열외의식'이 항상 붙어 다닌다. 그저 그렇던 사람도 일단 크든 작든 권력을 쥐게 되면 마음이 요동친다, "이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나에게는 뭔가 숨겨진 재능이 있고, 차별화된 힘이 있다"며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빠진다. 오죽했으면 '인간에게 권력을 주면 동물이 된다'는 속담까지 있을까? 중국 고사에 '사람이 벼슬을 하면 문관은 짐승이 되고, 무관은 맹수로 변한다'라는 말이 있다. 곧, 권력은 인간을 타락시키기 쉽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모든 환난의 근원이 벼슬, 즉 권력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

권력의 부침에는 항상 교만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근래 더불어민주당이 정권을 빼앗긴 근원도 '권력의 오만'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민주당 지도급 인사들의 성비위 사건이다. 고위직들이 여비서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패악이 잇따라 마침내 진보의 근간부터 뒤흔들었다. 또 가족이나 지인에게 사사로이 혜택을 주었다가 패가망신했다. 이들의 비행은 본인과 가족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마침내 정권교체라는 나비효과까지 몰고 왔다.

행정의 말단부인 해남 같은 농어촌 시·군 지역에는 유독 '작은 완장'의 위력이 크다. 도시의 경우 상대적으로 언론과 시민단체 등의 감시가 더 활발하고, 주민 간 이해관계가 훨씬 다양해 완장의 힘이 시골보다는 떨어진다. 반면, 농어촌 지역은 조그만 권력이라도 생업 현장과 직결되는 특성 때문에 그 파급력이 크다. 더욱이 일선 시·군 지역은 예산이 곧바로 집행되는 행정의 종착점인 데다, 선출공직자 일부는 자신의 생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쉬운 '이해충돌'의 소지가 커 일탈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해남을 비롯한 전국에서 함량 미달 '주번'들이 속출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주민에게 봉사하라고 손에 쥐어준 '공동 물주전자'로 '자신의 고추밭'에 물을 뿌리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쪽에서는 '떡고물'을 챙기려 이곳저곳 기웃거리기도 한다.

이런 얼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법을 어겼다면 응당 처벌해야 한다. 더불어 지속적인 감시와 주민소환으로 '나쁜 완장'은 예외 없이 벗겨 내야 한다. 그래야 덜 떨어진 자격 미달 '주번'이 완장을 차고 활개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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