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례(푸른영상 독립영화 감독)

나는 해남에서 13년을 살았지만 송지 땅끝마을에 가본 적이 없다. 대흥사도 서울로 떠나 오기 며칠 전에 학교 선생님이 데려가 주셔서 처음 가보았다. 해남사람이지만 해남 바깥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해남의 명소에는 가보지 못한 것이다.

어른이 되어 가족여행으로 해남을 찾았을 땐 전국 최대 규모의 공룡테마파크라고 해서 공룡박물관에 갔는데 다니던 중학교 근처라서 반가웠다. 울돌목도 그때 처음 가봤는데 거센 물살과 세찬 물소리에 압도된 채 물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서 몸이 떨렸다. 관광객의 시선으로 고향을 보는 일은 신기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두 번째 글을 쓰고 나서 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영화를 통해 해남을 더 알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문의였다. 영화인의 입장에서 제작비 지원, 창작 공간 지원, 지역 로케이션 정보 제공 등이 얼른 떠올랐다. 내가 사는 강화가 속해있는 인천시에서는 인천을 배경으로 한 영상물을 준비 중인 창작자의 체류·자료조사비용 지원, 인천을 매력적으로 표현할 차별화된 영상콘텐츠의 제작비 지원, 인천에서 5회차 이상 촬영한 영상물에 대한 관내 지출비용 일부 환급 등의 지원제도가 있다. 이렇게 제작비를 지원하거나 절감해주는 방법은 지자체에서 주도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돈이 없어도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지역 로케이션 정보 제공이다. 영화감독이 자신의 상상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화감독은 돈을 들여 세트를 짓거나 전국을 돌아다닌다. 지역 로케이션 정보 제공은 영화 속 한 장면의 배경이 될 수 있는 그 지역의 공간들을 자료화하는 것이다. 자료 구축을 위해 해남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남의 장소 한 곳을 꼽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공룡박물관이나 울돌목처럼 누구에게나 깊은 인상을 남기는 곳을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규모나 경관의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더 크고 더 빼어난 곳들이 많다. 스펙터클(볼거리)에 치중한다면 그다지 승산이 없으니 우리만의 특별한 접근이 필요하다. 기억에 남는 어떤 순간은 늘 장소와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런 기억과 장소들이 있다. 딱 한 번 가본 대흥사에 나를 데려갔던 선생님은 천불전 앞에서 눈을 감으라고 했다.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보게 되는 천불상이 나중에 만나게 될 반려자의 얼굴이라고 했다. 1983년의 천불전은 중간중간 이가 빠진 듯 비어있었다. 조용한 산사, 빛바랜 단청, 선명하지 않은 얼굴의 불상. 그 앞에서 느꼈던 쓸쓸함.

농번기 때면 학교 수업 대신 보리베기 봉사활동을 했다. 소풍처럼 줄을 서서 오래 걷다 보면 나타났던 보리밭. 베도 베도 끝이 안 나던 보리밭 안에서 느꼈던 막막함. 하지만 가끔 부드러운 바람이 불면 보리들은 물결처럼 출렁였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보리밭 장면에서 고향에서 보았던 그 보리밭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옥매산에 놀러갔다가 발견한 동굴.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 순간의 서늘함. 과거 또는 미래로 연결되는 통로일 것만 같아서 안으로 한 발짝만 들어가 보고 싶게 했던 신비감. 하지만 괴물이나 귀신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나는 돌아섰다.

삼지원에서 작은 배를 타고 얼마 안 가 내렸던 무인도. 떠난 배가 다시 올 때까지 바위에 붙은 가시리를 뜯던 언니와 나. 해는 높아지고 햇살은 따가워지는 데 그늘 하나 없는 그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했다.

내가 아는 해남의 어떤 장소들을 느낌과 사연을 담아 소개해보았다. 나와 다른 누군가는 또 다른 장소들을 자기만의 사연을 곁들여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에 대한 느낌과 비슷한 영화 속 한 장면을 함께 곁들이면 더 좋을 것 같다. 군민들이 나서서 해남의 숨겨진 공간을 발굴하고 기획해보았으면 좋겠다. 해남은 해남사람들이 가장 잘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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