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순(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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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꽃이 핀다. 온 산천이 울긋불긋 훤하다. 벚꽃에 이어 수수꽃다리, 복사꽃, 영산홍이 만발한다. 그런데 가슴은 시리다. 이리저리 화전놀이를 하면서도 자꾸 19세기 말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던 그때가 생각된다. 그때도 무심한 꽃은 이리 흐드러졌을까?

일본이 아시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그 발판으로 조선을 전초기지, 식량 공급지로 삼기 위해 정교하고 치밀한 식민지 전략을 세우고, 야금야금 조선 침략을 해 오던 19세기 말 그 시기에 우리 국민은 어떻게 살았을까? 모두가 들고일어나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며 싸웠을까? 식민지는 절대 안 된다고 모두 분노하며 결사 항쟁을 했을까? 나처럼 무심하게 꽃놀이 일상을 살았을까?

외세를 물리치고 봉건제를 타파하자고 삼남 지방에서 거국적으로 일어난 농민들의 봉기, 동학혁명을 당시 정부는 외세를 불러들여 살육으로 진압했다. 동학 진압을 명분으로 들어온 청과 일본은 주도권 싸움을 조선에서 벌였고, 이어 러시아와 일본이 우리의 독도를 군기지로 삼아 동해바다에서 전쟁을 벌였다. 양 전쟁의 승리로 승기를 잡은 일본의 가쓰라 총리와 미국의 태프트 장관이 밀약을 맺어 각각 조선과 필리핀 식민지를 인정하는 밀약을 맺었다. 즉 미국을 등에 업고 일본의 조선 식민지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같은 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해 실질적으로 대외에 국권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이때 조선의 녹을 먹는 관리들은 어땠을까?

그때도 강제 늑약을 반대하다 일본 헌병에게 끌려간 한규설을 비롯해 반대하는 대신도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을사 5적'이라 부르는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늑약에 적극 찬성했다. 일국의 녹을 먹는 대신들이 나라의 운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를 위해 일본의 국익에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치운 것이다.

일제로부터 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능가하는 훈1등자작 작위를 받은 윤덕영은 안중근에 의해 살해당한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회를 이완용과 함께 장충단에서 열었다. 한·일강제병합 때는 고종과 순종을 협박하여 옥쇄를 갈취하여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그 대가로 그들을 일본으로부터 최고의 관직과 은사금을 받았으며 온갖 부조리를 통해 얻은 부로 국왕 이상의 호화를 누리며 '아름다운 선진국 일본'을 찬양했다.

반면에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헤이그 제2차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국권 찬탈 을사늑약의 강제성과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다. 물론, 가재는 게편이라는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주고받는 계산법을 모른 고종의 순진한 국제정세관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일국의 군주로서 나라를 지키려고 애를 쓰다가 이게 빌미가 되어 퇴출되고 말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어땠을까?

동학혁명 당시 희생된 백성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도 되지 않는다. 1894년 1년 동안만 일본군과 관군에 희생된 농민만 30만이라고도 하고, 40만 명이라고도 한다. 학살은 1년으로 끝나지 않았고, 동학군이 숨어 있는 곳을 끝까지 찾아내어 몇 년 동안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특히 희생자가 많았던 호남지방은 이후 의병운동 참여에 상대적으로 숫자가 저조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우리 백성 중에는 일제에 항거하다 꽃잎처럼 산화하고 살아남은 분들은 만주나 연해주로 피난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한말 의병이라고 부른다.

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국비 유학 장학생을 길러 꾸준히 일본을 대변할 토착 왜구를 키우고, 무단통치를 통해 조선인을 노예화, 우민화시켜 식민지 운영에 빈틈없는 박차를 가했지만 백성들은 삼일운동으로 거대하게 다시 민족정신을 분출했다.

우리 고장 해남은 임진왜란 명량대첩, 동학혁명 마지막 피난처, 근대 의병운동, 4·11만세운동, 5·18민주화운동 등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숭고한 꽃을 피웠던 고장이다.

무심한 듯하나 꽃들은 알고 있겠지. 꽃은 피었으나 서늘한 4월의 이 기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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