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계곡사정교회 목사)

김영일(계곡사정교회 목사)
김영일(계곡사정교회 목사)
인류는 3만 년 전부터 그들이 이해한 종교와 예술의 세계를 동굴 벽화로 남겨놓았다. 1만년 전의 석기인들은 자신을 동물과 동일시하여 스스로가 사람이라는 자각을 못하였다. 이 시대의 토테미즘(동물숭배)은 인류의 정신세계가 6세 이전의 어린이의 그것과 비슷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 3천 년 전부터 인류는 수메르, 이집트, 바벨론, 인더스, 황하 등 소위 문명의 세계를 열어나갔다. 건국신화라고 하는 단군신화는 5천 년 전의 우리민족의 역사와 정신세계를 상징의 언어로 그린 이야기다. 자기를 곰이나 호랑이로 알던 부족들이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고한 결과, 곰 부족은 사람의 의식인 얼(영, 정신)을 얻은 것이다. 짐승으로 살던 인간이 비로소 얼 생명을 지닌 인간이 된 셈인데,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겪은 숱한 고난은 동굴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참사람이 되고자 하는 연단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사실 우리에게 얼, 정신, 영성이 탄생한 배경은 동굴인 경우가 많다. 원효나 초의선사 같은 큰 스님들은 큰 사찰이 아니라 주로 동굴이나 움막 같은 암자에서 배출되었다. 천주교 영성이 태동한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도 원래는 불교의 암자였으나 박해받던 천주교 신자를 숨겨준 일로 스님들이 처형돼 폐사된 곳이다. 이벽, 권철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등은 천진암에서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묵상한 것이다. 구한말에 개신교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은 최초의 개신교회인 소래교회에서 기독교 영성을 태동시키며 애국지사를 양성하였다. 원래 선교(仙敎)의 도인이었던 길선주목사의 새벽기도 운동은 동굴이나 골짜기에서 시작된 영성운동이 개신교의 영적 각성으로 승화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다윗은 사울 왕의 살의를 피해 사막 동굴에서 기거한 적이 있었고, 왕이 된 후에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시 동굴에서 은거한 역사가 있다(구약 시편57). 예수 당시, 철저한 유대교 종파의 하나인 에세네 파(派)는 사해의 언저리 사막(동굴)에 근거를 두고 있었고, 로마제국의 박해 시엔 원시 초대교인들은 지하동굴이라 하는 카타콤에서 예배와 성만찬, 장례식 등을 지내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동굴 신앙과 영성은 중세 수도원으로 이어졌고, 결국 기독교의 부활신앙은 사흘 만에 동굴(무덤)에서 나온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동굴은 생명과 영성의 탄생과 관계가 있는데 동굴은 바로 어머니의 태, 자궁인 셈이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선 고통과 피흘림이 전제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가 나올 무렵엔 두려움과 고통이 따르지만 막상 아이를 낳으면 그 고통마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그만큼 생명 탄생의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난과 시련 앞에서 어머니의 품과 모태시절로 회귀하고픈 경향을 띈다. 안정과 평화의 공간인 품이면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생산하는 창조의 공간으로서의 모태(자궁)인 셈이다. 하느님의 자비 또는 긍휼(矜恤, 불쌍히 여김)도 원래는 '자궁'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에게 예수는 물고기 뱃속(동굴)에서 3일을 보냈던 '요나'의 참회와 회개를 거론하면서 골방(동굴)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며 맑은 얼과 깊은 정신세계를 열어가라고 하였다. 30+1년 전에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리며 산화해간 오월의 넋들이 묻혀 있는 망월동 민주묘지는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을 잉태한 동굴이다. 가난한 농민, 노동자들의 참된 삶을 위해 죽을 때까지 가난하게, 청년처럼 살다 지난 13일 별세한 故 정광훈 진보연대 상임고문(초대 농민회 의장)은 살아 있는 자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서, 그의 삶과 정신은 마침내 부활의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꿈이 있는 자에게 행복이 마중 나올 준비를 한다!"던 그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귓가에 울려오는 미치도록 아름답고 환장할 만큼 푸르른, 그러나 피처럼 뜨거운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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