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계곡사정교회 목사)

김영일(계곡사정교회 목사)
김영일(계곡사정교회 목사)
눈 앞의 현실을 보면서도 쉬 믿기지 않는 일들이 더러 있다. 쇳덩이로 만들어졌는데도 가라앉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배, 난기류를 만나 요동치는 비행기 안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자는 사람,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젊은 여자 옆에서 침을 흘리며 자는 남자 등은 엄연한 현실의 모습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일어날 법하지 않은 장면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실제의 상황임을 어쩌랴.

이런 현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지난해 국민 가운데 세 명 중 한 명꼴로 한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는 통계를 보았다. 거꾸로 보면 일년 동안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들이 3분의 2를 넘는다고 하니까 아직도 우리는 '먹고 살기에 바쁜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그나마 작년에 가장 많이 팔린 책 중의 하나가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고 한다. 지난 30년 동안 하버드대에서 가장 많은 학생들이 수강하였고, 유명한 강의가 되어 작년엔 책과 인터넷을 통해 우리나라에 뜨거운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사회에서 돈과 권력이면 뭐든 다 되는 세상에 왜 하필 '정의'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고 성공해서 떵떵거리는 시대에 과연 정의는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공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공정사회'를 외쳐대는 모습이, 과거 광주를 총칼로 짓밟고 권좌에 오른 사람들이 외쳐대던 '정의사회구현'과 겹쳐지는 건 왜일까?

대한민국에서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우스갯말이 있지만 유일하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정의'가 아닐까 싶다.

부와 명예를 위해 인생을 달려왔지만, 국익을 위해, 선진국 대열에 합류를 위해 평생 일해 왔지만 정의가 서지 않으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을 깨달아서였을까. 일순간 불어닥친 '정의' 열풍은 우리 사회에 부재한 정의에 대한 열망 내지는 삶에 대한 성찰의 증거라 할만 하겠다. 그것도 작년에 한해서다. 냄비 근성 때문에 무엇이든 오래 가지 못하는 버릇이 있는 것이다. 

삶이 고단하거나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 한 번쯤 가보라고 권하던 곳이 대개 재래시장이나 병원, 교도소 같은 데였다. 하루하루 삶을 살아내기가 얼마나 힘겹고 버거운 가를 눈으로 목격하라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새벽부터 세상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부딪치고 있는 사람들, 세상에 그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삶은 계속되고 있음을 보라는 뜻이리라.

요즘엔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복권을 파는 가판대 주변에서 복권을 긁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희망이 없는 시대에 복권 한 장에 인생의 모든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당찬 결의를 그들의 눈매에서 읽는다. 또 요양원엘 가보면 사람이 자기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육신의 종착역이 어디쯤에 있는지도 생각해 보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성경 창세기 후반부에 이집트의 파라오(왕)가 야곱에게 "네 나이가 몇이나?"고 묻는다. 평생 산전수전을 다 겪고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하면서 백 삼십이라고 고백한다. 파라오가 물은 '네 나이가 몇이냐'는 '네가 지금 나잇값을 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더 나아가면 '네 속사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일 것이다. 한마디로 '네가 사람이 되었느냐'일 것이다.

나무는 속살에 있는 나이테에 나이를 남기고 호랑이는 줄무늬에 그의 영혼을 남긴다고 한다. 사람은 그 이마의 주름살에 '삶의 깊이와 사람됨'을 새기지 않을까! 백발과 주름살은 신이 내린 면류관임을 생각할 때 허투루 봐서는 안 될 인생의 진실이다. '네 나이가 몇이냐'는 신의 질문 앞에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처럼 한 번도 남을 울리지 못했고, 길가에 버려진 연탄재처럼 한 번이라도 남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지 못했던 나를 돌아볼 따름이다. 사람이 된다는 게 이렇게도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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