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계곡사정교회 목사)

김영일(계곡사정교회 목사)
김영일(계곡사정교회 목사)
원시 자연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던 인류가 그 자연을 뛰쳐나와 문명의 시대를 열어 젖혔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닌 도시 문명이었다. 자연을 철저히 배제한 채 인간의 편리와 이기의 문화는 도시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고대나 중세에 도시 문명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상시 국민총동원 체제이어야만 가능했다. 성곽을 높이 쌓고 심지어 왕의 무덤까지도 국가총동원 체제하에 구축해야 했다. 당연히 인근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날라야 하는 절대 다수의 노예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평생을 채석장에서 돌을 깨다가 죽어가는 것이 삶이었다. 도성 주변으로 성곽을 둘러치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근대에 와서 일명 '부르주아(성 안에 사는 사람들)'라 부른다. 가진 것이 없는 무산자(無産者)들을 일명 '프롤레타리아'라 부른다. 바벨론의 지구라트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등 인간이 한 곳에 정착하여 세워 나간 문명의 첨탑은 비단 성서에서 고발하는 바벨탑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인류의 종교와 정신사에서 기원 전 5백년에서 기원 후 5백년 사이에 기라성 같은 성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공자와 맹자를 필두로 하는 중국의 제자백가 그리고 노자와 장자, 인도의 바라문 승려들과 석가모니,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팔레스티나의 예수와 모하메드 등이 천 년 사이에 태어났고 활동했다. 자연을 뛰쳐나와 도시 문명을 이룩해 살던 인간사회에 근본적인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이를 인류의 네 번째 혁명인 '사상(思想)의 혁명'이라 불렀다. 인간의 탄생이 첫 번째 혁명이라면 농업혁명이 두 번째, 도시문명이 세 번째, 그리고 사상혁명에 이은 산업혁명이 다섯 번째 인류사의 혁명이라 했다. 도시문명에 이은 사상혁명기에 태어난 인류의 스승과 사상가들은 많으나 그 이후엔 정신적, 사상사적, 영적 인간의 탄생이 드문 것은 놀라운 일이다.

중국의 양명학을 창조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동방기술(技術)지국이라 불렸다면,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약화된 양반의 기득권 강화를 위해 예학과 종법제도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수십 년간 예송논쟁이라 불리는 소모적인 당파싸움에 허덕여야 했다. 그 결과 조선은 '동방예의(禮儀)지국'이라 이름하는 소위 예절 바른 나라가 된 것이다. 상하 위계질서에 근거한 신분제에만 몰입하던 조선이 세계사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쇄국(鎖國)의 빗장을 잠그고 있다가 일제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타의에 의한 근대화를 강요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가 물러가고 본격적인 자생적 근대화가 군사정권에 의해 강요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군대화'에 의한 '근대화'를 이룩한 셈이다. 이때 본격화된 이농(離農)의 가속화는 말 그대로 'Rural Exodus(농촌 탈출)'에 필적할 만했다. 콘크리트로 농촌과 도시를 도배하고, 농촌의 젊은이들을 도시의 공장지대로 몰려들게 하여 이룩한 근대화였다.

군대식 국가총동원 체제로 진행되는 근대화 과정에서 사람들은 몸과 가정, 국가 시스템의 근대화는 가져왔으나 정작 중요한 정신과 문화의 근대화는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후유증이 현대에 나타나고 있다. 물질과 풍요 속에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듯해 보이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 놀기 때문에 삶은 갈수록 피곤하고 공허하다. 인문학적 교양과 공부를 소홀힌 한 탓에 자꾸 권력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 돈을 벌려고 한다. 이번에 군의회에서 유치 신청을 철회하기로 했다고 하는데, 당초에 핵발전소를 들고 나온 것 자체가 부재(不在)한 정신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먼 옛날에 소월 시인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고 노래했는데, 오늘 다시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는 '엄마야 누나야, 해남 살자'가 아닐까. 청정해역과 강과 산, 들녘에 생물이 살아 숨 쉬는, 나도 청정 해남에 오래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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