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복희(언론인)

채복희(언론인)
채복희(언론인)
거의 50년 만에 내린 폭설이었다고 했다. 서해와 남해 바다를 보면서 완도와 진도 두 개의 커다란 섬을 거느린 따뜻한 남쪽의 대명사 해남에 엊그제 내린 눈이 그랬다. 그 즈음 서울에는 매섭게 찬 바람이 몰아쳤고 한강이 얼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반도의 추위는 비슷한 위도의 다른 지역보다 수은주가 더 아래로 내려갈 정도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그러나 남해안 일대와 제주도는 코끝을 베어갈 정도의 추운 날씨가 매우 드문 편이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릴 때 언 귀나 코가 땅에 떨어져 있다는 농담은 이 지역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눈이 와도 아침 나절 잠깐 하얗게 색칠된 땅이 햇빛이 나면서부터 반짝이다 스러져 금방 녹아 붉은 땅을 드러낸다.

눈이 귀하기 때문에 해남 사람들은 어린 시절 눈밭에 놀던 기억이 많지 않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번에 내린 눈은 북녘의 스키장 만큼이나 높이 쌓여 모처럼 눈썰매를 즐길만큼 푸짐했건만 새하얗고 드넓은 들판에는 눈을 뭉치며 노는 아이들은 정작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같은 한반도의 날씨에 대해 기상관계자들은 북극의 평균 기온이 10도 가량 낮은데다 이른바 '북극진동'에 의한 찬 공기의 남하로 맹추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삼한사온이 사라지고 이상 기온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충격적인 이슈가 되지 못한다. 더구나 대도시 위주의 삶으로 재편된 현대인들에게 추위와 더위 쯤은 인공적으로 조정되는 일과성 주변환경 정도로 치부된다. 추우면 빌딩 안에 꼭꼭 숨어 히터를 틀면 되고 더우면 냉방기가 실내를 시원하게 해준다. 국가를 경영하는 위정자들 역시 대도시 유권자들의 삶에 통치의 눈높이를 맞추느라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해남과 같은 지역은 다르다. 대자연이 주는 혜택을 모태로 삼아 적응하면서 때로는 조금씩 이기거나 져주기도 하며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해왔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는 변함이 없다. 생명을 키우는 대지와 바다는 여전히 이 지역민의 삶과 생존 방식을 결정하고 그것은 이 땅에 사람이 사는 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공수로와 인공강우까지 최첨단 과학기술의 시대를 맞았지만 태양과 공기, 대지와 바다(물)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이며 지구의 생명을 싹트게 하는 그 네 가지 요소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다윈이 남긴 '종의 기원' 이후 최고의 생물학 저술서라 일컬어지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생명체란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보유한 유전자를 후세에 안전하게 배달하는 '전달기계'일 뿐이라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지구의 지배자로 행세하고 있지만 인간 역시 유전자를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수많은 생물종 중 하나이며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철저히 유전자 생존의 방편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도킨스는 심지어 지성과 사랑 등과 같은 아름답고 고상한 의식들마저 생존의 열망에 따른 이기적 성질과 관련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밈(meme, 문화유전자)이라고 명명했다.

거룩한 종교적 행위나 깊은 철학적 사유도 인간이란 기계가 자신의 유전자를 잘 간수하고 전달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역시 대단한 존재임에 분명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기상이변에 대한 인간의 적응은 어차피 생존을 위한 적극적 대처임에 분명하고 결국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리라는 낙관론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오랜 인간의 생존사를 보면 그 낙관이란 것이 만만치가 않다.

반세기만에 찾아왔다는 폭설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진화해 가려는 이들을 경계하는 자연의 징후로 받아들일만한 일이다. 빠른 속도란 '지나친 욕망'의 쌍생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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