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자(언론인·호남대 겸임교수)

김원자(언론인·호남대 겸임교수)
김원자(언론인·호남대 겸임교수)
본격적으로 날씨가 추워지는 것 같아 눈 오는 날 구워먹으려고 고구마 1박스를 샀는데 친지가 또 한 박스를 보내와 갑자기 고구마 부자가 돼버렸다. 껍질이 빨갛고 속이 노란 요새 유행하는 호박고구마다. 먹음직스런 고구마 두 박스를 보고 있으려니 옛날 생각이 난다. 간식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때, 고구마는 참 고마운 먹거리였다.

입이 출출하면 제일 만만한 게 고구마였다. 쪄 먹거나 구워 먹어도 그만이고 도시락 반찬이 없으면 간장을 치고 조려서 싸가기도 했다. 고구마가 무슨 반찬이 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럼 어떻게 고구마로 빵을 만들며 피자로 굽기도 하는가? 고구마라는 식품이 그만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식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 때는 가난한 이들이 밥 대신 먹는 구황식품의 하나로 가난의 상징이었지만 고구마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참으로 오랜 세월 서민들의 입을 즐겁게 해준 허물없는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

웰빙시대를 맞아 이제 고구마는 성큼 그 지위를 상승하였다. 미국공익과학센터(CSPI)는 '최고의 음식 10(10 Best Foods)' 첫 순위에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고구마를 올려놓고 "건강과 영양을 생각한다면 주저 없이 감자보다 고구마를 선택하라"고 권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고구마 건강법'도 등장했다.

아침 일찍 100g의 고구마를 껍질째 먹으면 각종 암을 예방하고 위염, 위궤양, 알레르기 비염, 변비 등도 치료할 수 있다고 신봉자들은 주장한다. 제과·제빵업체는 고구마 케이크, 고구마 라떼, 고구마 아이스크림, 고구마 요거트, 고구마 스낵, 고구마 김치 등으로 새로운 맛을 원하는 젊은이를 공략하고 있다. 구황작물이라는 우중충한 그림자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고구마도 패션처럼 유행이 있다. 시대에 따라 소비자의 입맛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우리 앞에 나타난다. 80년대 중반까지는 물고구마의 시대였다. 어디를 가나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던 시절, '고구마는 곧 물고구마'란 등식이 성립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밤고구마의 등장으로 이런 등식은 깨졌다. 사람들의 입맛을 단박에 낚아챈 밤고구마는 20년 동안 고구마 시장을 평정했다.

오랫동안 고구마의 왕좌 자리를 차지한 밤고구마는 지난 2005년, 그해 겨울 듣도 보도 못한 호박고구마의 등장으로 체면을 구겼다. 새로운 맛에 반한 소비자들이 대거 호박고구마로 이탈했다. 소비자들의 취향도 제각각 나눠지기 시작했다. 최근엔 칼라 고구마(주황색·붉은색·검정색 등)와 세척 고구마 등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포장 단위도 1킬로그램 이하 소포장 형태로 변하는 등 고구마의 변신은 계속되고 있다.

고구마는 우리 고유의 작물이 아니라 멕시코 등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메꽃과의 식용식물이다. 영조 39년(1763년)에 유조통신 정사 조엄이 일본에서 씨 고구마를 얻어와 부산 동해와 제주도에 전파한 것이 우리 고구마 역사의 시작이다. 전국 어느 곳이나 재배가 가능하지만 해남과 여주 등이 대표적인 생산 지역이다.

특히 해남은 붉은 '황토'가 상징이다. 황토는 물이 잘 빠지지 않고 미네랄이 다량 함유되어 단맛이 풍부하고 식이섬유와 무기질 성분이 많은 고구마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생산량도 한 해 3만 5,000여 톤, 면적으로는 전남의 49%, 생산량은 전국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은 호박고구마의 인기가 대세이지만 소비자의 입맛은 언제 또 변할지 알 수가 없다. 해남이 고구마의 명성을 계속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연구와 고구마에 대한 소비자의 기호를 추적해야한다. 우리 어머니는 밤고구마의 등장과 함께 추억 속으로 사라진 해남 물고구마를 자꾸 얘기하신다. 겨울이 깊어져 수분이 없어지면 더욱 더 조청처럼 당도가 높아지는 해남 물고구마. 요즘 대세인 호박고구마나 자색고구마보다 옛 생각이 나게 하는 물고구마가 어느 때는 더 먹고 싶기도 하다.

고구마의 변신은 무죄다. 식품마다 기능성을 강조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때에 고구마도 가격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해남만의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 소비자를 사로잡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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