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최재천(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최재천(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얼마 안 있으면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 마당에 청매향이 그윽할 것이다. 겨울 달밤 금강스님께서 청매꽃잎을 녹차잔 위에 올릴 것이다. '코를 찌를 듯한 매화향(박비향撲鼻香)'이 벌써부터 그립다. 당나라 스님 황벽(黃蘗) 선사가 읊었다. '뼈를 깎는 추위를 만나지 않았던들(不是一番寒徹骨 불시일번한철골) / 매화가 지극한 향기를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爭得梅花撲鼻香 쟁득매화박비향).'

얼마 전 우연히 알았다. 대한민국 농업의 '밀물시대'를 열었다는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의 자서전적 책 제목의 이름이 '박비향'이라는 것을. 지난해 9월 출간된 책인데 벌써 2만부가 넘게 팔린 이른바 '베스트셀러'란다.

어린 시절 겨울, 안방 윗목은 장롱이 밀려나고 고구마 차지였다. 가을날 밭에서 거둔 고구마는 11월께면 안방으로 들어와 한겨울을 버텨내는 간식이 됐다. 그렇지 않아도 부모님과 네 형제가 살아가기에 충분치 않은 방이었다. 해남 사람들에게, 그리고 고향 화산 사람들에게 고구마는 가족이었다. 결코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

정운천이 책에서 고구마를 얘기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구황작물 고구마가 건강다이어트 식품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한 전문가는 '무수리 궁녀를 장희빈 만들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고구마 재배농가의 소득증대를 이루었고, 무려 네 배의 시장규모를 확대했다고 했다. 정운천이 책에다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찬했다(自畵自讚).

세상의 '밥상혁명'은 지금 두 갈래로 진행 중이다. 하나는 '식량주권'이다. '내가 발 딛고 선 땅에서 직접 먹을거리를 생산하자, 내가 먹는 먹을거리의 질을 스스로 통제하자.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식량을 확보하자. 그래서 내 나라 내 땅의 먹을거리가 뿌리를 내리게 하자'라는 생각이다. 둘은 '로컬 푸드(Local Food)'이다. 우리말로 바꾸자면 '지역 먹을거리'쯤 되는데, 먹을거리가 밥상에 오르기까지 이동한 거리를 말한다. 우리는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 국가 중에서 일본과 함께 가장 식량자급률이 떨어지는 나라다. 대부분 음식은 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수입품이다. 이쯤 되면 우리 몸속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지구온난화 시대에 이동에 따른 에너지 소모는 계산하기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제철음식이 아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나라의 농업정책은 '식량주권'을 강화하고, '로컬 푸드'를 늘려가는 쪽으로 방향 잡는다.

정운천은 내 고향 해남 화산에 '경작지'가 아닌, '사업장'을 가지고 있었다. 농부가 아니라 일정부분 '고구마' 사업가였다. 그럼에도 이번 해남군 용역 결과는 '해남고구마의 산업화에 대한 기반 조성 및 산업화가 미약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이명박 행정부의 초대 농림수산식품부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미국산 수입쇠고기 협상의 책임자가 됐다. 시민들은 저항했다. 얼마 후 '자신의 명예가 훼손당했다'며 MBC PD수첩 제작진을 고소했다. 검찰은 제작진을 기소했다. 지난 20일 서울지방법원은 PD수첩 제작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농업의 밀물시대를 여는 선지자였을까. 아니면 밥상혁명의 썰물시대로 후진기어를 넣고 만 무면허였을까. 아무리 양보해도 '박비향'일 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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