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 - 산이면 깔따구

▲ 바다가 매립되기 전 산이면은 깔따구 천지였다. 깔따구 때문에 시달림이 컸던지 산이면 흑두리는 지금도 집집마다 방충망이 설치돼 있다. <주순안(72)씨 댁>
▲ 바다가 매립되기 전 산이면은 깔따구 천지였다. 깔따구 때문에 시달림이 컸던지 산이면 흑두리는 지금도 집집마다 방충망이 설치돼 있다. <주순안(72)씨 댁>
아이들은 책보로 얼굴 가리고 조회 참석
아낙은 얼굴가득 세수비누 칠한 후 빨래

1960년대 학교 조회시간, 운동장이 시꺼멓다. 창문으로 들어온 깔따구 때문에 교실도 난리인데 운동장은 아예 깔따구로 에워싸 있으니 오늘 조회도 죽을 맛일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책보자기로 얼굴을 싸고 운동장으로 뛰어간다. 다 물려도 얼굴만은 지켜야 한다는 각오에서 아이들은 알리바바의 도둑에서 나오는 도둑처럼 눈만 빼꼼히 내놓고 책보자기로 얼굴을 감싼 채 운동장에 기다랗게 선다. 깔따구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교장도 마찬가지, 오늘 훈시는 짧게 끝났다. 
 간척공사가 있기 전 산이면의 명물이었던 깔따구, 초여름부터 9월 중구까지 그야말로 산이면 전 지역은 깔따구 천지였다.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논과 밭을 시꺼멓게 물들인 깔따구 속에서 밭을 매는 시골 아낙들의 고통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흙 묻은 손으로 여기저기 긁다보면 어느새 얼굴은 흙으로 뒤범벅, 논밭에서 돌아오는 아낙들의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깔따구 때문에 도저히 밭을 매기 어려울 때는 아예 불을 피워가며 밭을 맸다고 하니 그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논밭에서 깔따구에 시달린 아낙들의 고통은 빨래터에서도 여전했다. 그래서 아예 얼굴에 세수 비누를 범벅으로 칠한 후 빨래를 했는데 세수 비누가 귀한 시절이라 그도 여의치 않는 가정이 많았단다.         
 잔칫집에 가기 위해 모처럼 입은 모시적삼도 깔따구 때문에 금방 시커멓게 되고 들녘에서 새참도 마음 놓고 먹을 수도 없었다. 산이 흑두리 할머니들은 깔따구 이야기가 나오자 징하디 징한 세상이었다며 말도 하지 말란다. 
 가을까지 극성을 부렸던 이 깔따구는 특히 농사철인 모내기철과 벼 타작, 콩 수확철에 더욱 극성이었다. 이 시기에 아이들이 제일 싫어했던 일은 소를 띠끼는 일, 해질녘까지 깔따구 속에서 소를 띠끼는 일은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산이면 깔따구에 대한 기억은 해남읍민들도 가지고 있다. 차를 몰고 산이면을 갔다 오는 길에는 여지없이 차 범퍼가 움직이질 않는다. 자동차 앞뒤 할 것 없이 시꺼멓게 둘러붙은 깔따구 때문에 시야도 확보하기 힘들었다.
 당시 깔따구로 인해 산이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 있었다, 몸에 바르는 일명 깔따구 물약이었다. 외제품이었던 이 물약은 마을의 점방마다 취급했는데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점방 문짝에 붙여진 약 이름마다 깔따구, 깔다구, 깔타구, 깔따귀 등 모두들 제각각, 그러나 표준어가 무엇이라고 따지는 사람하나 없이 모두들 이 물약 사기에 바빴다.
 깔따구가 유독 산이면에서만 극성을 부렸던 것은 3면이 바다인데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갯벌이 오랫동안 드러나 있었기 때문. 또한 갯벌이 넓게 발달돼 있었던 점도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산이면 사람들을 괴롭혀 왔던 깔따구는 1990년 이후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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