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자리 밀쳐내고 당당히 주인공 된 농부

어떤 이가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습니다. 시원한 강바람이 얼굴의 땀을 식혀 주는 듯 합니다.
어! 그런데 그림이 이상합니다.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인물이 이상합니다. 공재가 뭘 잘못알고 그림의 주인공을 바꿔 버렸을까요.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을 인물은 당연히 선비나 신선이어야 하는데 들녘에 있어야할 농부가 나무그늘에 턱하니 앉아 쉬고 있으니 이상할 법도 합니다.

공재 그림의 매력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무 그늘에 쉬고 있는 인물을 자신과 같은 선비가 아닌 농부로 바꿔 버린 매력 말이지요.

신선과 선비가 있어야할 자리에, 그들을 밀쳐내고 당당히 주인공으로 등장한 농부의 모습은 조선 회화사에 있어 혁명적인 일이었지요.

이 작품을 대하고 있으면 왠지 모를 웃음이 나옵니다. 선비의 자리를 턱하니 그것도 여유를 부리고 앉아 있는 농부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통쾌하기까지 하니까요. 그것도 시 한수 읊을 줄 모를 농부가 강바람을 쐬며 여유를 즐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림의 주인공을 자연스럽게 농부로 바꿔버린 공재는 그림의 주제를 '휴식'이라 이름 짓습니다. 그림의 주인공이 양반이었다면 고사관수도니 수하인물화니 하는 그러한 이름이 어울렀겠지요. 그러나 그림의 주인공이 농부이다 보니 자연과 유유자적하는 주제가 아닌 노동 후에 취하는 달콤한 휴식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지요.

공재의 휴식 작품은 백성들의 삶을 그린 풍속화가 아닌 산수 인물화에 속합니다. 공재가 살았던 시대에 산수 인물화의 주인공을 농부로 표현한 예는 극히 드물지요.

당시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주로 선비나 신선, 아니면 고작해야 미인이었지요. 물론 당시에도 서민들의 모습이 담긴 작품도 있습니다. 동자나 마부, 뱃사공, 어부 등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작품의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을 받쳐주는 배경으로만 처리되었지요. 

따라서 공재는 작품의 주인공이 농부이다 보니 자연에 흠뻑 빠져 몰아지경에 이른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파에 찌든 모습도 아닌 적당한 선에서 농부의 표정을 담았습니다.

화가가 그림의 대상을 선택할 때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산수 인물화의 주인공을 조심스럽게 농부로 바꿔버린 공재는 이제 본격적으로 서민들의 삶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나물 캐는 여인'과 '짚신 삼은 노인' 등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재가 풍속화라는 양식을 탄생시킨 것은 조선 회화사상 위대한 혁명이었습니다. 공재가 있었기에 이후 김홍도와 신윤복이라는 위대한 풍속화 화가들의 등장이 가능했을 테니까요.

물론 농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공재의 작품들은 김홍도의 풍속화에서처럼 박진감과 현실감은 덜합니다. 주인공의 주변이 일터가 아닌 선비나 신선들이 앉아있을 배경이 대신하고 있으니까요.  

그림의 주인공인 농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공재 이후 그림 주인공으로 당당히 등장할 자신들의 앞날을 예견한 듯, 조금은 더 여유 있고 자신감 넘치는 생각을 혹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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