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가을야생화 꽃밭이었다

사람 떠난 녹도에는 가을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나 한적함을 달래고 있었다.
사람 떠난 녹도에는 가을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나 한적함을 달래고 있었다.
인적 없는 섬에 야생화 들짐승만 오롯이

사슴섬이라 불리기도 하는 녹도는 5년여 전 무인도가 됐다.
녹도는 일제시대 청옥이라는 일본사람이 이곳에서 사슴을 길렀다고 해 붙여지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울돌목 다음으로 물살이 세다는 삼정선착장 앞, 녹도까지 들어가는 배는 강한 물살 때문에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물살을 헤치며 도착한 녹도, 비교적 길이 예전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대표적 가을꽃인 붉은 자줏빛의 산부추 꽃과 자주색 용담 꽃이 먼저 길손을 반긴다.
뿌리줄기를 한방 약재로 사용하기도 하는 삽주(어린순은 나물로 먹기도 함)와 해열·화상에 사용되는 오이풀, 노란색 꽃의 미역취(돼지나물이라고도 불림), 하얀색 꽃인 참취도 섬 여기저기에 피어 인적 끊긴 섬을 지키고 있었다.

해남YMCA 윤영신 부장은 "화산면 안도(질매도)와 죽도에 비해 녹도에는 다양한 야생화와 식물이 분포해 있다"고 말했다.

죽도는 전체적으로 수분이 많은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숲을 이루고 있는 갈대와 옛 사람들이 살았을 집터를 감싼 대나무 등이 무인도의 한적함을 더해주는 느낌이다. 

이제는 허물어져 가는 집들과 학교 관사도 눈에 띤다. 예전 우수영초등학교 녹도분교(1970년 설립, 1991년 폐교)가 있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았던 녹도,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감나무와 팽나무가 남아 주인 대신 빈터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떠난 빈 건물에는 노래책과 레코드판, 이불 등만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넓은 토지와 밭 수렁에서 주로 자라는 소루쟁이와 왕골도 눈에 띠었고 마을 주위에는 감나무, 복숭아나무 등이 남아 사람 대신 새들에게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흰죽지수리로 보이는 새도 눈에 띠어 쥐 등의 작은 포유류가 이 섬에 살고 있는 듯했다.

섬 해안가에는 총알고동, 눈알고동, 배수리고동 등 다양한 고동과 삿갓조개 등이 바위틈새를 지키며 가끔씩 찾아오는 낚시꾼들을 반기고 있었다.

녹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려면 등대가 있는 섬의 동쪽 산 정상으로 갈 것을 권하고 싶다. 이곳에는 온갖가지 아름다운 가을 야생화가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꽃이 별모양인 자주쓴풀, 꽃이 나팔모양인 잔대(약초로도 쓰임), 가을의 시작을 가장 먼저 알리는 며느리밥꽃, 습한 풀밭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물매화, 산 정상에서 만나니 더욱더 애잔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자란도 지천에 피어있다. 산 정상의 다양한 야생화는 이곳을 가을 꽃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산 정상에는 이곳 주민들의 안전을 지켰을 헬기장과 곳곳에 조림한 황칠나무와 전나무 등도 눈에 띠었다.
윤영신 부장은 "기존의 나무를 베고 황칠나무 등을 조림한 듯하다"며 "섬의 특성에 맞지 않는 조림으로 아름다운 야생화와 나무들은 죽어갈 것이다"고 안타까워했다.

한편 녹도는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간 산림청에서 조림사업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조림지 사후관리(풀베기 작업)를 하는 중이다. 해안가의 해송이 병으로 고사돼 난대림 복원차원에서 10여종의 난대수종을 조림했다.

이곳 섬에는 둑을 쌓아 바다를 막고 농사를 지었던 흔적도 남아있다. 갯벌에는 짱둥이와 게가 뛰어놀고 있었다.
삼정리에 사는 김영이(52세)씨는 "섬이 둥실하게 생겨 다라지섬이라고도 부른다"고 말했다.

문내면 학동 박성용이장은 "녹도의 완만한 능선은 다 밭이었다"며 "사람들은 모두 섬을 떠났지만 너구리 노루 고라니 등 초식동물들은 섬에 남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봄에 읍에 사는 김성호씨가 녹도에서 더덕보다 더 귀하다는 100년 이상 된 잔대(딱주)를 캐가기도 했다"며 녹도는 숲이 좋고 경관이 아름다운 섬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5년여 전까지 녹도에서 산 사람은 임광남씨였다. 타지 사람이던 임 씨는 땅 관리인 역할을 하면서 섬에 요양원을 지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또 임 씨 전에 녹도에서 살았던 사람은 문내 학동이 고향인 김남홍(74세)씨였다. 김 씨는 지난 1997년 17년간의 섬 생활을 마치고 선두리로 이사갔다.

임 씨는 육지에서는 땅값이 비싸 많은 논을 경작할 수 없어 당시 땅이 많던 녹도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재배한 농산물을 배에 실고 육지로 가져와 팔아야 했기 때문에 주로 담배와 고추 같은 가벼운 작물을 재배했다고 한다.

80년대에는 완도에서 이사 온 4집과 해남에서 온 6집 등 10가구 이상이 이 섬에 살았다.
그 당시에는 해남군수와 경찰서장이 헬기를 타고 섬에 들려 섬 주민들을 위해 연육교를 건설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임 씨는 "연육교만 건설됐어도 섬에 계속 살았겠지만 배를 댈만한 마땅한 곳이 없어 육지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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