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박남일작가

▲ 김남주

▲ 해남이 낳은 민족시인 김남주 시인 생가가 옛 모습을 찾았다.

▲ 광주 망월동에 있는 김남주 시인 묘.

▲ 광주 망월동에 있는 김남주 시인 묘.

▲ 김남주 시인의 옛 생가.

세상에는 무조건 추앙받고, 그의 작은 결점까지도 만인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있다. 해남이 낳은 김남주 시인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가 바라던 '금(金)판사'가 되어 가문에 영광을 안겨준 적도 없고, 서울에서 높은 벼슬을 하여 고향 마을 입구에 현수막이 달리게 한 적도 없다. 그는 '금의환향'은커녕 늘 죄 없는 가슴을 졸이며 어둠을 틈타 고향의 품으로 파고들곤 하였다.
 그런 그가 추앙받아야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백기완 선생의 말처럼 그는 "사는 것이 늘 흐리멍덩한 사람들, 아침에 깨어난 것 같아도 곧바로 조는 사람들, 아니 저만 잘살겠다고 바동거리는 넋살(정신)을 버쩍 나게 하는 새뚝이"이기 때문이다.
 '새뚝이'란 '남사당놀이'에서 새 막의 시작을 알리는 사람을 말한다. 김남주는 인간이 해방된 세상을 온몸으로 우리에게 일깨워준 새뚝이였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지금도, '김남주'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느껴진다고 한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어언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혁명 시인 김남주는 미모의 여성 탤런트 김남주에 가려져버렸다. 하지만 소비시대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도 하늘에 떠 있는 별빛을 가릴 수는 없다. 그렇다. 진정한 시인은 죽어서 별이 된다. 김남주 시인 역시 우리 가슴에 박힌 별이 되었다.  

수재 소년, 학교교육을 거부하다

 

 김남주 시인은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태어났다. 문헌에 따르면, 시인은 1946년 10월 16일생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1945년생이라는 말도 있다.
 해남 화산 출신의 김준태 시인은, 언젠가 시인의 생가 아궁이 곁에서 어머니 문 여사로부터 직접 그렇게 들었다고 한다.
 태어난 해야 어찌되었든 시인은, 새벽이면 날이 새기가 무섭게 "소 띠끼러 가라"고 깨우고, 등잔불 밑에서 숙제하고 있으면 "석유 닳아진다, 불 끄고 자라"고 채근하는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무렵 주변 사람들은 김남주를 '짱뚱이'라고 불렀다. 땅딸막한 키에 거무튀튀한 얼굴이 영락없이 갯벌에서 날뛰는 '짱뚱이'를 닮았던 것이다.
 '짱뚱이' 김남주는 그렇게 삼산초등학교를 마치고 광주에 있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어서 등록을 포기하고, 뒤늦게 읍내 해남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혁명동지이자 친구인 이강을 만났다. 중학교를 마친 두 소년은 함께 광주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였다. 하지만 이강만 시험에 붙고 김남주는 떨어졌다. 공부다운 공부를 할 틈이 없던 김남주에게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김남주는 난생 처음으로 짐을 꾸려 광주로 떠난다.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기 위해서였다. 일 년간 재수를 준비한 그는 이듬해인 1964년에 호남의 명문 광주일고에 합격한다. 동네잔치를 벌일 일이었다. 또한 출신학교인 해남중학교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시인의 아버지는 마치 자식이 과거급제라도 한 듯 마음이 우쭐해하며, 아들이 장차 검·판사 아니 '금(金)판사'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 하다못해 면서기나 군서기라도 되어주기를 바랐다. 손발에 똥거름 묻히며, 관공서 아래서 굽실굽실 살아온 평생의 한을 자식이 풀어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곧 꺾여버리고 말았다. 명문고생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벌이던 박정희 정권은 1965년에 한일협정을 체결하여 일제 침략의 역사에 면죄부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투쟁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김남주는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한편으로 학교교육에서 역사의 진실과 정의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목격하였다.
 김남주의 눈에 비친 학교는 비겁했다. 옳은 것을 옳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선생님들은 측은했다. 일류대에 합격하기 위하여 시험공부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수재들의 모습도 안타까웠다.
 자신의 안위와 개인의 출세 빼고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그 '입시공장'에 염증을 느낀 김남주는 과감히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교문 밖에서는 '자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독재를 넘어, 꿈 너머 꿈을 꾸다

 

 아버지의 꿈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대가로 김남주는 자유인이 되었다. 하지만 차마 그 사실을 집에 알릴 수 없었다. 그는 계속 광주의 자취방에 머무르며 고교 과정을 공부하여 1966년에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자유인 김남주는 여세를 몰아 그는 서울대에 응시했으나 연거푸 실패했다. 다시 재수를 하였다. 아니 재수라기보다는, 폭넓은 독서를 하면서 틈틈이 시험공부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 김남주는 러시아 문학에 빠져들었다.
 1969년. 스물셋 나이로 김남주는 전남대 영문과에 합격한다. 하지만 자유인 김남주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제도교육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한편으로 영어판 '프란츠 파농'이나 '루카치'의 책을 읽고, 칠레의 민중시인 '네루다'의 시를 읊었다.
 그 무렵, 굴욕적인 한일협정과 베트남전쟁에 5천여 젊은이의 피를 팔아먹은 대가로 외화를 벌여 들인 박정희 정권은, 여기에 헐값의 노동력을 보태어 대규모 산업자본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1970년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노동착취 현실에 항거하며 분신을 하였다. 영문과 대학생 김남주는, 온몸을 태우며 현실에 항거한 전태일의 용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부터 김남주는 '3선 개헌 반대' '교련 반대' '노동3권 보장'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그러던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유신헌법'을 공포하였다. 4.19 직후 민주당 정권을 무력으로 밟아버리고 쿠데타로 정권을 강탈한 뒤, 사회가 안정되면 군인으로 돌아가겠다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박정희 정권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영구집권을 위한 음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해 가을,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졸업도 할 수 없는 처지에 김남주는 잠시 해남에 내려와 있었다. 그러던 중에 유신 선포 방송을 들은 김남주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치를 떨다가 당장 광주로 올라가, 당시 전남대 법대 복학생이던 이강을 만났다.
 두 사람은 즉시 갑오농민혁명 전적지 순례에 나섰다. 그리고 녹두장군과 농민군의 영령 앞에 맹세하였다. 독재의 심장에 꽂히는 죽창이 되겠노라고.
 김남주와 이강은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평범한 대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며 좋은 일자리를 바라는, 그런 단편적인 꿈이 아니었다. 그는 독재정권에 짓눌려 신음하는 백성과, 타락하고 병든 나라를 구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꿈 너머에 있는 꿈이었고, 혁명의 꿈이었다.
 김남주와 이강은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지하신문인 <함성>을 만들어 전대, 조대와 광주 시내 5개 고등학교에 배포하였다. 민족항쟁의 역사와 유신의 본질을 폭로하고, 거기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는 내용이었다.
 모두가 두려워 숨죽이고 있을 때 그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현실 속에서 꿈을 실천하고 있었다.

 

남민전, 유신독재의 심장을 겨냥하다


 <함성>지를 배포한 뒤 김남주는 잠시 시골로 피하였다가 서울로 갔다. 피신 중에도 계속 신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1973년 2월, 제호를 <고발>로 바꾸어 전국적 규모의 반(反)유신투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유신독재에 맞장을 뜨려던 김남주, 이강, 박석무 등 10여명의 전사들은 신문을 만들어 서울로 탁송한 며칠 뒤에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김남주는 서울 북부경찰서에 연행되어, 이른바 '죽음의 집'에 갇혔다. 중앙정보부 간부가 권총을 꺼내어 그의 머리통에 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 사실에 대해 훗날 김남주는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꼈다. 나는 나 자신을 저주했다."고 술회했다. 결국 김남주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걸려 김남주는 1심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항소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8개월여 만인 1973년 12월에 석방되었다. 학교에서는 이미 말끔하게 제적처리가 되어 있었다.
 학적을 잃은 김남주는 해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죽음의 집'에서 공포에 굴복했던 자신의 치욕스런 경험을 <진혼가> 등 몇 편의 시에 담았다.
 '총구가 나의 머리 숲을 헤치는 순간 /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 혓바닥을 내밀었다'(시 '진혼가' 중에서)
 1974년 여름, 계간문예지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와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김남주는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전사였다. 고향에서 시를 쓰며 나약한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이듬해인 1975년, 다시 광주로 올라간다. 그리고 광주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인 '카프카'를 열었다.

 카프카 서점은 광주지역 운동가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독재자 박정희가 1975년 가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된 관련자 8명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다음날에 전격적으로 형을 집행해버린, 사법사상 초유의 만행이 저질러질 무렵이었다. 엄청난 공포가 한반도를 얼어붙게 했다. 그런 잔혹한 세월을 근근이 버티던 카프카 서점은 결국 1년 만에 경영난으로 문이 닫혔다.
 1977년, 한동안 도시의 그늘에서 방황하던 시인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번에는 막연한 낙향이 아니었다. 시인은 농민운동을 새로운 활동방향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해남에서 정광훈, 홍영표, 윤기현 등과 농민회를 결성하였다. 그때 결성한 해남농민회는 나중에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되었다.
 그해 말 다시 광주로 올라온 해 광주에서 소설가 황석영, 김상윤, 최권행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고,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후배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김남주는 번역 작업을 하는 한편으로 일본어판 '파리꼬뮨' 강좌도 열었다. 그러나 강의를 듣던 한 학생의 밀고로 공안기관의 습격을 받게 되고, 간신히 체포를 면한 김남주는 다시 서울로 도피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시인은 서강대 경제학과를 중퇴한 박석률의 권유로 새로운 지하혁명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그것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이었다.
 시인 김남주는 비로소 규율과 엄격성을 갖춘 전사가 된다. 그 무렵 김남주는 '레닌의 생애', '쿠바혁명의 해부' 등과 같은 책들을 읽으며 '혁명적 조직 없이 혁명의 성공은 없다'는 명제를 가슴에 새겨둔 터였다. 남민전준비위 가입은 그런 명제를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광주 5월, 그리고 저 창살에 햇살이

 

 남민전은 이재문을 중심으로 74명이 연루된 조직이었다. 김남주는 조직에서 <민중의 소리>제작을 맡았다. 또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부자의 재산을 탈취하는 전위대에도 참가하였다. 실제로 이들은 모 재벌 회장의 집을 터는 작전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 공안기관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1979년 10월 4일, 김남주는 이재문, 이문희, 차성환 등 2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2개월에 걸친 고문수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재문과 신향식은 사형, 안재구 등 5명은 무기징역, 김남주는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동지들이 고문에 시달리는 동안, 박정희는 부하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종신권력을 꿈꾸던 독재자의 최후는 참으로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새 군부의 수괴 전두환이 권력에 침을 흘리며 군화끈을 조이고 있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 체제가 무너졌어도 김남주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대부분의 긴급조치 사범들은 석방되지만 남민전 사건은 '공안 사건'으로 분류되어, 석방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리하여 김남주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도소에서 맞이한 첫봄 5월, 밖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신군부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옥중에서 광주 학살의 진상을 전해들은 시인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 몸부림은 시가 되었다. 감옥에서 시는 유일한 무기였다. 집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공간에서, 시인은 책의 여백이나, 펼친 우유 껍데기에 못으로 꼭꼭 눌러 시를 썼다. 또 '똥종이'라고 부르는 누른 갱지 위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그렇게 시를 썼다.
 감옥은 80년대의 억압과 그에 맞선 싸움을 가장 잘 상징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김남주의 시세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광주 학살의 진상과 인간해방을 향한 외침을 담은 그의 옥중 시들은 대학가를 강타하였다. 시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어느새 노래가 되었다. 그의 옥중 시 <노래>는 <죽창가>라는 노래가 되어 어느 시위 현장에서나 불리게 되었다.
 이 무렵 옥중에서 '똥종이'에 쓴 옥중 시 60여 점은 어떤 힘도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김남주는 말했다.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이어야 하며, '시인은 싸우는 사람, 전사이어야 한다'고.
 한편 옥중에서 혁명의 외침을 그렇게 시에 담고 있을 때, 감옥의 창살에도 햇살이 들었다. 그 햇살은, 중학교 국어 교사로 남민전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박광숙이었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도맡아 옥바라지한 박광숙과 김남주는 편지와 면회를 통해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은 동지이고 연인이었다.
 그러던 1984년에는 첫 시집 '진혼가'가 출간되었다. 그해 12월에는 문화예술운동단체들이 공동으로 주최하여 '김남주 석방 촉구 출판기념회'를 열면서 석방운동이 펼쳐졌다. 석방운동은 나라 밖으로도 이어졌다.
 그리하여 198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국제펜클럽대회'에서도 '김남주 시인 석방결의문'이 채택되었다. 1988년에는 문인 502명이 석방탄원서를 법무부장관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사람답게 살다 죽으면 되지 뭐

 

 문인들의 국제적인 연대를 통한 김남주 석방운동은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8년 12월,  9년 3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오랜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김남주는, 박광숙과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10년의 세월을 창살 이편과 저편에서 주고 받은 그들의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시인은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다.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 봄을 기다릴 줄 안다 / 기다려 다시 사랑은 / 불모의 땅을 파헤쳐 /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 천년을 두고 오늘 / 봄의 언덕에 /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시, '사랑은' 중에서)
 1990년에 김남주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이미 고장이 나 있었다. 1992년 건강상의 문제로 '민족문학연구소장' 직을 사퇴한 뒤, 번역과 창작활동을 하였다. 그런 1993년 말, 시인은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투병생활을 하던 중에 문병온 후배 소설가 김영현에게 시인은 이렇게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처음엔 나도 힘들더라. 심리적인 흔들림도 많았고,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흘러가니까 마음도 가라앉더라. 사람은 언젠가는 한번은 다 죽게 되는 걸, 하는 기분이 들더라. 사람답게 살다 죽으면 되지 뭐"
 그리고 1994년 2월 13일 새벽, 오열하는 아내 박광숙과 어린 아들 '토일'이를 남겨놓고 시인은 눈을 감았다. 
 김남주는 생전에 모두 6권의 시집을 펴냈다. '진혼가'(1984),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솔직히 말하자'(1989), '사상의 거처'(1990), '이좋은 세상에'(1992년) 등이다. 이 가운데 세 권은 그가 옥중에 있을 때  간행되었고, 나머지는 석방된 뒤에 나왔다. 또한 시인의 사후에 유고시집 '나와 함께 이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 출간되었다.
 시집 외에도 김남주는 여러 권의 번역서를 냈다. 또한 그의 평전과, 그를 추모하는 문인들의 산문집도 속속 출간되었다. 어쩌면 그는 동시대 양심적 문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시인인지도 모른다.
 그를 민족시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혁명시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뛰어난 서정시인이기도 하였다. 초기에 그는 주로 유신치하에서 파기되는 인간의 존엄성과, 훼손당한 양심을 노래하였다.
 더불어 소외된 농촌 현실과 피폐한 농민들의 생활 정서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옥중에서 그는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첨예한 의식과 혁명적 순결성을 단호하게, 때로는 냉정하게 단순화하여 노래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시가 과격하다고 한다. 이념적 급진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비판이, 폭압적인 현실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 시인의 시 정신을 덮지는 못할 것이다. 알량한 예술성의 논리로 전사의 숭고함에 흠집을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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