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을 넣으세요조선 전통불화양식 지켜온 화승(畵僧)
미황사 등 전국 사찰에 200여 불화작품 남겨

 

전남 무형문화재 31호 탱화장으로 활약
한국 근현대 불화에서 4대 금어에 해당

 

 평생 탱화를 그리며 대흥사의 역사와 함께 했던 인물, 임종 순간까지도 대흥사 길목에서 탱화를 그렸던 고재석스님은 한국 근현대 불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은 인물이다.
 낭월 고재석스님은 조선말기 금어(金漁)인 금호(錦湖)에서 보응(普應)을 거쳐 일섭(日燮)으로 이어지는 불화의 맥을 잇는 화승(畵僧)으로 한국 근현대 불화에서 4대 금어(불화를 제작하는 자들 중 으뜸)에 해당된다.
 금어로서 탱화의 맥을 이어왔던 그는 그 위치에 맞게 고집스럽게 조선시대 불화의 형식을 지켜왔던 인물이다. 그는 불화의 화면구성을 비롯해 선묘, 채색 등 전통형식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1996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 탱화장으로 지정됐다.
 전통을 고집했던 그는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지 못했다. 밑그림 4000장을 그려야 채색을 배울 수 있고 밑그림도 버드나무 숯으로만 그릴 것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또 버드나무 숯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그 위에 먹 선을 입히고 난 후에야 숯 자국을 떨어내야 하는 등 까다롭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낭월스님에게 탱화를 배웠던 박소정씨는 숯 자국을 털어내는 데 필요한 꿩 깃털을 찾기 위해 하루는 스님과 함께 두륜산 산속을 헤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과학문명이 준 혜택보다는 스승에게 배웠던 방식을 그대로 고수했기에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은 사람이 드물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4000장의 밑그림을 그리려면 보통 4~5년이 걸리기 때문에 낭월스님에게 탱화를 배운다는 것은 보통의 불심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는 것이다.
 워낙 까다로운 전통방식을 그대로 계승했기에 작품 하나 만드는데도 몇 개월이 소요됐다는 낭월스님은 정법(定法)을 따르지 않고 너무 쉽게 그리는 탱화에 대해 항상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특히 불화가 갖춰야 할 화면구상과 도상배치, 색채 등이 무시된 탱화가 사찰 법당에 걸려진 것을 보면 몹시 개탄했다는 낭월스님은 1924년 현산면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대흥사에 출가해 사미승 생활을 하던 그는 대흥사에 불사를 하러 온 화승(畵僧) 김일섭의 눈에 띄게 된다. 15살 때 대흥사 불교전문강원을 수료한 그는 곧바로 김일섭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10년간 화승으로서 불화의 기초를 닦으면서 불화가(佛畵家)인 금어의 길을 가게 된다.
 김일섭(1900-1975)은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스님 화가로 197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으로 지정됐다. 김일섭은 19세기 말 마곡사 출신인 금어인 금호에게서 불화를 공부한 인물이다.
 낭월은 김일섭으로 부터 좋은 화승이 될 것이란 지목을 받은 후 김일섭이 주도한 경기도 개성의 안화사 불사 부터 참여해 1948년 송광사에 머물때까지 10년동안 불화의 기초 작업을 충실히 마치게 된다.
 낭월은 이때 스승인 김일섭과 그 스승인 김보응으로부터 초본을 전수받았고 평생 그것을 바탕으로 탱화를 제작했다. 특히 김일섭이 그려준 시왕도와 김보응의 지장도 초본을 비롯해 18세 때 연습한 신중도 초본 등을 고스란히 소장해 옛 불화양식을 그대로 지켜왔다.
 낭월의 탱화는 미황사를 비롯해 황산 도장사, 대흥사, 광주, 전남지역, 제주 및 충남북, 경남지역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점이 각 사찰에 봉안돼 있다.
 낭월은 불화 외에 1981년 대한 불교조계종 주최 제10회 불교미술전에 출품해 입선한 적이 있고, 1982년에는 일본 오사카의 고려사 범종불사 기금 마련을 위해 선서화(禪書畵)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고재석스님은 탱화뿐 아니라 단청작업에도 참여해 왔고 달마도 같은 선화(禪畵), 인물, 초상화, 추사체풍의 서예 등에도 재능을 보였다. 
 조선시대 전통 불화양식을 고집해 온 낭월은 대흥사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후세에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해남문화원에서는 그의 증언에 의해 대흥사에 얽힌 다양한 설화내용을 채록해 수록했을 만큼 그는 대흥사와 함께 해온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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