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인간애 표현한 삼당시인 백광훈

▲ 옥봉의 시에는 민중의 정서와 사람 냄새가 난다. 옥천면 송산의 옥봉서원은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 백광훈 서체.

▲ 옥봉의 묘는 북평면 동해리 뒷산에 위치해 있다.

▲ 옥봉 백광훈 묘비.

 

 신분제 사회에서 시(詩)는 사실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가난한 백성의 눈으로 옛 시인의 삶을 더듬다 보면 더러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커다란 삿갓을 눌러 쓰고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정처 없이 떠돌던, 요컨대 조선 후기 김삿갓(金笠, 1807~1863) 시인을 떠올려 보라. 무지한 백성의 마른 가슴에도 비로소 물결이 일렁일 터이다.
 그런데 방랑시인의 대명사 김삿갓보다 300여 년 앞선 시대에, 조선에는 이미 유랑문학의 운치와 전통이 싹트고 있었다. 그 전통의 밑뿌리가 바로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1537~1592) 시인이다.
 백광훈 시인은 중종32년에 장흥군 안량면 기산리 수원 백씨 가문에서 백세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수원이 본관인 그의 일가는 연산군 때 귀양을 내려온 할아버지 백회 때부터 장흥에서 터를 잡고 있었다.
 다섯 살 때 광훈은 옥천면 대산리 옥산초당으로 와서, 정3품 부위 벼슬을 지낸 정응서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여섯 살 때부터 문학적 천재성을 발휘하였다.
 옥산초당에서 공부한 지 1년 반 가량이 지났을 때, 휴가 삼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광훈은 글방을 나서다가 문득 정갈한 시 한 수를 읊는다.
 '잘 있어라. 뜰 앞 가득한 나무들아(好在庭萬樹) / 꽃 피는 봄이면 다시 돌아오리니(花開又一來)'
 간결하고도 세련된 시문을 엮어낸 여섯 살 시인은 스승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광훈의 글 솜씨는 나날이 익어갔다. 열한 살 무렵에는 즉석에서 지은 한시를 줄줄 읊어댔다. 스승은 어린 제자의 비범한 시적 재능에 감탄하며, 서울 유학을 권했다.
 명종 5년, 서울로 간 광훈은 열셋 나이로 진사초시를 가볍게 통과한 뒤 양응정, 이후백, 사암 박순 등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정은, 을사사화의 후유증으로 뒤숭숭하였다. 지각 있는 선비들은 정계에 나가는 것을 꺼리고 유랑을 하거나 술독에 빠져들었다.
 당시로는 그것이 의리이며 풍류였다. 광훈 또한 과거시험을 제쳐두고 지팡이 하나에 짚신 몇 켤레 달랑 걸머진 채 흐르는 구름처럼 명산대찰을 떠돌았다. 그러면서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울분을 진한 붓끝으로 토해냈다. 가히 300년 앞선 '김삿갓'이었다.
 그러던 스무 살에, 백광훈은 하동정씨와 혼인하였다. 하지만 새색시는 2년 만에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슬픔에 잠겨 있던 시인은 어느 날 홀연히 집을 나선다.
 그의 발걸음은 소제 노수신이 있던 진도에 닿았다. 일찍이 을사사화 때 이조좌랑에서 파직된 노수신은 순천을 거쳐 진도에 유배 중이었던 것이다. 노수신의 문하에서 광훈은 더욱 심오한 시와 사상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어렸을 적 스승인 정응서의 딸과 스물네 살에 재혼을 한 광훈은 옥천면 대산리 원경산 부근에 '만취당'과 '옥산서제'를 지어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뒷산 봉우리 이름인 '옥봉(玉峰)'은 그에게 영원히 따라붙는 호가 되었다. 이어 1564년, 옥봉은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중진사 시험을 통과한다. 하지만 일찍이 출세욕을 접은 그였으므로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대신 이율곡, 송익필, 최립, 이산해, 양사언, 이순인, 하응림 등의 쟁쟁한 문사들과 글로 교류하였다. 이들 여덟 문사를 '팔문장'이라 하였다.
 더불어 옥봉은 뛰어난 문장가인 정철, 서익과도 가깝게 지냈다. 특히 옥봉은 자신보다 열두 살 아래로 '띠동갑'인 백호 임제와 각별하게 지냈다. 이 둘은 말 한 필로 함께 유랑을 하면서, 하루씩 번갈아가며 주인과 마부 행세를 하였다. 열두 살 아래 백호가 주인이 될 때면 옥봉은 진짜 마부가 된 듯이 굽신거리며 주인을 섬길 정도로 격의 없고 자유롭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선조 5년, 옥봉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명에서 두 사신 한세능, 진삼모가 조선에 왔다. 20년 유배에서 풀려나, 당시 대제학 벼슬을 하고 있던 노수신은 옥봉을 '백의제술관'으로 천거하였다. 이른바 '국빈'을 수행하며 글벗과 말벗이 되어주는 중요한 임무였다. 옥봉은 사신들에게 즉흥시 한 수를 지어 바쳤다.
 '성 위의 날아가는 까마귀 모두 돌아가려 하는데(城上飛鴉歸欲盡) / 자리 주위에 흐르는 강물은 무정하게 흘러가네.(席邊流水去無情)'
 이미 성당(盛唐) 시인 이백과, 두보의 경지에 도달한 옥봉을 매우 좋아한 사신은 상을 내렸다.
 옥봉과, 최경창, 이달을 아울러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사대부의 붓끝에서 당쟁 도구로 쓰였던 시문학을 서민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정치도구였던 시에 민중의 정서와 사람 냄새를 담아냈던 것이다.
 <옥봉집>에는 모두 504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리움과 이별, 인생무상, 속세초월 등의 정서를 읊은 그 시들은 애틋하고 다정하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갓 혼인한 아내와 사별하였으며, 또한 빈곤한 가세와 병약한 식구들 때문에 늘 마음 졸이던, 슬픔과 고뇌가 따뜻한 인간미로 승화되어 있다. 그런 정서를 담은 대표시로 '기우(奇友)'가 있다.
 '나그네 갈 길이 멀고 가까움을 아니(客行知近遠) / 곳마다 청산이 첩첩이네(處處有靑山) / 저물어가는 해에 비껴 강남을 바라보며(日晩江南望) / 제비 돌아올 날만을 생각하네 (相思燕子還)'
 옥봉은 또한 당시 조선의 정치현실을 통렬하게 풍자하며 저항시인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중국 황제를 빗대는 시 '명황(明皇)'을 보자.
 '서촉에서 겪은 갖은 풍상에 귀밑머리 희어지고(西蜀風霜兩髮絲) / 편한 세상에 돌아오려 해도 더욱 나오기 어려우니(歸來興慶更羈危) / 가련하다 남녘에서만 떠도는 괴로운 신세 (可憐南內遷移苦) / 당시 안녹산의 난 때문이었다고 말하지 말라(莫道當時有祿兒)'
 양귀비와 더불어 호사를 누리다가 '안녹산의 난'으로 황실을 아들에게 맡기고는 서촉으로 도망쳐 다니던 당 현종의 행각을 빗댄 시다. 옥봉은, 이를 거울로 삼으라며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채찍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옥봉의 사상은 주로 양명학에 밑절미를 둔 것이지만 '만물일체'와 '삼계유심' 등 불교적 사상과도 살짝 닿아 있다. 스승 노수신이 서산대사 등과 교류하였듯, 옥봉 또한 절간에 드나들며, 스님들과 교류하였다. 옥봉의 아들 진남이 <옥봉집> 목판을 대흥사에 의뢰하여 만들게 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터다.
 한편, 옥봉의 맏형인 기봉 백광홍의 문집 <기봉집>에는 송강 정철의 명작 <관동별곡>의 모태가 된 <관서별곡>이 전해온다. <기봉집>에 수록되어 백광홍의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이 또한 옥봉이 일찍이 관서지방을 유람할 때 지었다는 설도 힘을 얻고 있다. 옥봉과 송강이 막역한 사이였으며, 정철은 "옥봉의 문장은 빼어남과 맑음을 기개로 하고 있고 청명한 시가와 오묘한 필법은 으뜸가는 재주다."라며 극찬한 바 있다.
 매번 벼슬을 사양하던 옥봉이었지만, 그는 가난에 지친 식구들을 위해 마흔한 살 때에 비로소 참봉 자리 하나를 얻었다. 그렇게 작은 벼슬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 가던 옥봉은 1582년 5월에 마흔여섯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옥봉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선조임금 또한 옥봉의 죽음을 매우 애석하게 여겨 친히 영여를 하사하고, 이율곡을 장례관으로 임명하였다. 율곡은 서울에서 전라도까지의 운구 행렬을 직접 관장하였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 송강 정철도 해남까지 운구를 도왔다. 그해 9월, 옥봉의 유해는 해남 북평면 동해리 뒷산 중턱에 묻혔다.     
 옥봉의 문학적 재질은 아들 백진남, 손자 백상빈에 이어졌다. 사람들은 이들 삼대를 '삼세삼절(三世三絶)'이라 불렀다. 또한 옥봉의 두 형 광홍, 광안과 사촌형 광성 등도 당대의 쟁쟁한 문인들이었다. 그래서 이들 4형제를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이라 하였다.
 나중에 백진남은 아버지 옥봉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옥천면 송산리에 사당과 옥봉강당을 세웠다. 송산리를 중심으로 전해오던 옥봉의 유물은 근래 새롭게 마련된 전시실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옥봉의 호쾌한 글씨체는 <대동서법>, <고금법첩> 등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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