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계곡 사정교회 목사)

 1994년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나는 서부전선 최전방에서 철책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3월을 넘어 4월이 되자 그 널따란 비무장지대 여기저기에 연둣빛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마른버짐처럼 보이는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봄의 황홀경에 빠져들 때 초소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울려퍼지던 노래가 미국의 여가수 '셀린 디옹'이 부르던 '더 파워 오브 러브(The Power of Love)'였습니다. 감미로우면서도 애절한 음색에 힘이 느껴지던 그 노래는 들으면 들을수록 아름다운 노래였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슬프고 무상한 노래로 들리기도 했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겨라!'는 군대식 달콤한 처세술도 있다지만, 왠지 그런 봄날의 감상에 푹 빠져들 수만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라고 하는 곳의 특성상 '자유보다는 통제와 규율'로 돌아가는 틈바구니에서 그런 호사를 부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가 봅니다.
 제대를 눈앞에 두고 가는 말년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군용트럭에 올라서는 순간에도 한기(寒氣)가 느껴지는 곳이 군대이고 보면 아무리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프고, 아무리 껴입어도 동짓달 기나긴 밤은 무지 추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자유(自由)가 없는 곳은 그 누구라도 춥고 배고픈 것이 인간의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최승자 시인이 가을을 향해 '가을은 동의하지 않아도 온다'고 노래한 것처럼, 올해의 봄도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올 것입니다.
 아니 봄은 이미 우리의 마음과 삶의 터전에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갑게 오는 봄을 마냥 앉아서 반갑게만 맞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겨울바람과 함께 날아온 철새들이 조류독감(AI)의 진원지가 된다는 보도에 가슴이 조마조마해진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좋은 계절에 봄바람을 타고 한반도를 급습하는 가공할 황사(黃砂)의 위협 앞에서 또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시사철 한반도는 계절의 순환과 자연의 섭리 앞에 결코 무풍지대가 아니듯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것도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루과이라운드(UR)와 세계무역기구(WTO)에 이어 세계화라고 하는 미명하에 착실하게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의 전략은 이제 자유무역협정(FTA)이라고 하는 마지막 완성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국가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우리 사회의 양극화현상을 구조적으로 고착시킬 한미FTA는 농촌과 도시의 차원을 넘어 국가전체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밀려오는 세계화의 파고(波高)에 속수무책일 뿐인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엄하고 대우받는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 주권을 가진 나라가 당당히 누려야할 권리, 아이를 여럿 낳아도 마음 편하게 키울 수 있는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1979년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쓰러졌을 때 이제 서울의 봄(자유)은 온다고 했지만 이듬해 봄에 마늘밭에 계시던 할머니가 '봄은 또 뭣하러 온다냐?'고 자조섞인 불평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에서는 수많은 자유의 꽃들이 총칼에 의해 떨어지고야 말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정원에 핀 꽃은 때가 지났거나 바람이 불었거나 떨어져도 괜찮다지만, 이 땅에 한 번 피어난 인간의 꽃은 그 어떤 불의한 권력이나 폭력에 의해 떨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오는가!'라며 자유 없는 조국의 현실을 탄식했지만, 오늘 우리는 '장차 빼앗길 땅에 봄은 또 뭣하러 온다냐?'고 탄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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