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대 호남읍지 실린 비문내용과 달라

현지 비문 일본식 한자표기도 눈에 띄어

 

  ‘명량대첩의 상징적 유물이자 보물 503호로 지정된 명량대첩비가 일본에 의해 과연 바뀌어 버렸을까’
 우수영에 세워진 명량대첩비가 당초 것이 아닌 식민지 시절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같은 주장은 1860년경에 제작된 호남읍지에 나타난 명량대첩비문과 현재 충무사에 건립된 명량대첩비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명량대첩비가 당초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그동안 지역내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된 바 있다. 
  윤병진옹(황산면 춘정)은 충무사에 건립돼 있는 명량대첩비 비문의 글씨 중 일본식 한자 표기가 눈에 띄어 이상하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최근들어 민부삼씨(해남읍 해리)의 조부인 고 민병석씨의 문집에서 현재의 명량대첩비 비문과 다른 명량대첩 비문 내용이 발견돼 이 같은 의문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1860년생인 고 민병석씨 문집을 살펴본 윤병진옹은 이 문집에서 소개된 명량대첩 비문은 일본식 한자표기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다 고 민병석씨의 문집에 소개된 명량대첩비문과 1860년대 제작된 호남읍지 제8권 해남현읍지편에 소개된 명량대첩비문의 내용이 동일해 현재 건립된 명량대첩비가 당초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명량대첩 비문이 이상하다는 주장은 1989년 해남문헌집 제작당시에도 제기된바 있었다.
 윤병진옹에 따르면 해남문헌집을 제작하기 위해 일본의 학자인 尺村八幡太郞(群馬縣 桐生市 境野町)에게 해남과 관련된 문헌을 요구한바 있는데 그가 보내준 문헌 중 하나가 명량대첩비 내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내준 명량대첩 비문은 현재의 명량대첩비문 내용과도 다르고 호남읍지에 실린 내용과도 달랐다고 한다.
 현재까지 그 문헌을 보관하고 있는 윤병진옹은 “일본인들이 비문 내용을 바꾸기 위해 작성한 초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명량대첩비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민부삼씨는 “충무사에 건립돼 있는 명량대첩비와 대흥사 표충사에 건립된 서산대사 비는 같은 수성암인데도 이순신 사망이후 91년만에 건립된 명량대첩비가 정조 때 건립된 서산대사 비보다 상태가 너무도 양호하다는 점도 이상하다”고 지적했다.
 또 “1942년 일본인들이 초등학생들을 동원해 명량대첩비를 끌고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비문에 상처가 없다는 점도 이상하다”고 말했다.
  명량대첩비가 일본인들에게 의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윤병진옹은 “명량대첩 비문을 지은 이민서 후손에게 서하 유고집을 찾아달라”고 부탁해 놓는 상태이다.
 한편 명량대첩의 상징이자 우수영 주민들의 충의 상징인 명량대첩비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이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가 진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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