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지웅(해남군장애인종합복지관장)

2017-02-17     해남신문
 

북평면 남창에 살고 있는 내가 퇴근길에 읍내에 들어서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마침 편지지가 떨어져서 읍내 문구점에 들렀더니 매장 안이 온통 초콜릿 천지다. 가만히 날을 헤아려보니 '발렌타인데이'다.

발렌타인데이의 유래는 3세기 경 로마황제가 전쟁 중에 결혼을 금지시켰음에도 규율을 깨고 몰래 사랑하는 연인들의 결혼을 성사시키다 처형 당한 사제 성 발렌타인의 기일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라고 알려져있다. 서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 날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있었다.

예쁘고 귀여운 여자아이들이 자기들만큼이나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세심하게 골라 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 초콜릿을 받는 사람은 누군지 몰라도 참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예쁜 여자아이들의 손에 들려 있던 달콤해 보이는 초콜릿을 떠올리다가 동시에 떠오르는 건 몇 년 전 어떤 잡지에서 본 까만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던 아프리카 소년의 얼굴이다. 열 두어살 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의 작은 손은 어린 미소와 어울리지 않게 거칠었다.

그 소년은 초콜릿의 주된 원료인 카카오를 재배하는 아프리카 어느 깊은 산 속에 위치한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온 가족이 카카오 농사에만 매달려도 하루 벌어 하루 먹기가 힘든 상황이라 학교에는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했다. 6살 이후로 날마다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며 전문 카카오 농사꾼이 되어버린 아이는 정작 카카오로 만들어 낸 "초콜릿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며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고 수줍게 웃었다고 했다.

큰 낫으로 카카오 열매를 다루느라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그 아이의 고단한 손은 아직도 초콜릿을 사려는 내 손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달콤한 초콜릿에 배어 있을 어린 소년의 고된 노동이 쌉싸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이름 모를 소년의 어린 노동은 내가 살아왔던 60~70년대 흔한 풍경이었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어린 여공들의 고된 공장살이와 겹쳐졌고, 그들의 고된 노동이 말도 안되는 수준의 헐값에 소모되는 것이 미덕인 거대자본의 착취 구조와 다르지 않기에 달콤한 초콜릿은 쓰기만 했다.

싼 값과 좋은 품질 속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 아프리카 농민들에게 낮은 가격으로 사들인 카카오 콩, 임금이 싼 나라에서 싼 값에 생산된 초콜릿, 식품다국적기업의 충분한 수익을 보장하면서도 대량 판매를 가능하게 하는 가격의 결정, 이 지속 가능한 생산자 착취 구조가 그 진실임을 알기에 달콤하기만 한 초콜릿이 씁쓸해진다.

다행히 요즘은 비중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공정무역이라는 방식으로 저개발국 생산자에게 적정한 대가를 지불하여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소비자에게는 윤리적 소비의 기회를 제공하는 무역의 형태가 확장되어 가는 모양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공정무역은 카카오 생산과정에서 아동노동이나 강제노동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죄 의식 없이 초콜릿의 달콤함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의 선물'이라는 카카오가 카카오 생산자들에게도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 되었을 때, 최종 소비자인 우리도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선물할 수 있지 않을까?

정직한 노동으로 생산되는 카카오, 정당한 노동의 가치에 대한 보상으로 얻는 생산수입, 아이들이 농장이 아닌 학교로 갈 수 있도록 만드는 진정한 신의 선물이 되는 카카오, 생산자의 평범한 일상을 보장해주는 윤리적 소비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초콜릿.

발렌타인데이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초콜릿을 마음껏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