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테클라’ 700년 전통이 빚어낸 ‘시민의 자부심’

지역축제 포화시대, 지역성 담은 축제로 변해야 한다 8. 시민들이 만들어 가는 스페인 산타 테클라

2025-11-10     노영수 기자

시민 주도 속 행정 조력 모델 만들어
145개 단체 퍼레이드·인간탑 등 선

스페인 카탈루냐의 항구 도시 타라고나시(Taragona)에서는 매년 9월 ‘산타 테클라(Santa Tecla)’ 축제가 열린다. 1321년 성녀 테클라의 성유물 봉안 이후 이어져 온 이 축제는 종교적 전통과 시민의 열정이 결합된 복합형 축제로, 도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전통과 현대, 신앙과 공동체가 맞물려 움직이며 지역축제가 참고할 수 있는 운영 철학과 실행 체계를 제시한다. 

▲중세시대 전쟁 전 의례를 재현한 공연.

700년 전통의 타라고나 산타 테클라 축제는 ‘시민 주도-행정 조력’이라는 독창적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올해 축제는 종교 의례, 인간탑, 불꽃 퍼레이드 등 500여 개 프로그램을 145개 시민단체가 직접 기획·운영했다. 어린이 전용 축제 ‘페티타’는 다음 세대에게 참여를 통한 시민교육을 제공하며 전통 보존과 현대적 혁신을 동시에 이뤄낸 지속가능한 축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9월 12일 저녁 7시 타라고나 구시가지 중심 플라사 데 라 폰트 광장이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산타 테클라 축제 개막을 알리는 ‘크리다’를 보기 위해서다.

개막 연설자는 산 살바도르 지역 활동가이자 배우인 비비아나 드 살바도르였다. 그녀는 “타라고나는 수천 년 동안 전쟁과 무관심을 견디며 자식들을 품어온 어머니지만 종종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며 “기억하고 돌보는 사랑을 행동으로 증명하자”고 말했다. 그녀는 산 살바도르 주민협회 회장으로 지역 공동체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루벤 비뉴알레스 시장은 “타라고나 사람들의 영혼이 가장 뜨거워지는 시간이다”며 “수많은 시민이 거리에 나왔지만 아직 사고는 없었다. 시민 의식이 이 축제를 지탱하는 힘이다”고 강조했다. 

▲산타 테클라 축제의 하이라이트이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인간탑 쌓기 모습.

축제는 9월 12일부터 24일까지 13일간 쉬지 않고 이어졌다. 아침 9시 대성당 앞 광장에서는 전통 악기 연주가 시작됐다. 점심때가 되면 거리마다 ‘테클라 타파’ 천막이 펼쳐지고 타라고나 전통 음식 ‘에스피네타 앰 카르고린스(멸치 스튜)’와 ‘마마데타’ 냄새로 골목이 가득찬다. 오후 4시 대성당 앞 광장에선 인간탑 공연이 시작된다. 빨간 셔츠를 입은 ‘카스텔러(인간탑 팀원)’ 약 200명이 광장 중앙에 모이고 드럼 소리가 울리면 가장 아래층부터 차례로 인간탑을 쌓기 시작한다.

누군가 “피냐(Pinya)!” 외쳤다. 가장 아래층을 뜻하는 이 단어는 카탈루냐어로 ‘함께 버티기’를 의미한다. 20~30명이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버티는 동안 그 위로 2층, 3층, 4층이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헬멧을 쓴 여자아이가 꼭대기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숨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정적. 아이가 두 손을 하늘로 쭉 뻗는 순간 환호와 박수가 뒤섞였다. 

카스텔러의 한 팀원은 “각자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탑이 완성된다. 이게 바로 우리 공동체의 원리다”며 “직업도 나이도 다르지만 탑 안에서는 모두 평등하며 서로의 몸을 감당하면서 신뢰를 배운다”고 말했다.
 

60여개 단체 모여 1년 전부터 준비
시간대별 프로그램으로 체류 유도

축제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코레포크(불달리기)'다. 대성당 앞 광장에 악마 복장을 한 수백 명의 시민들이 퍼레이드를 선보인다. 장대 끝에 불꽃을 매단 악마단이 앞장서고 뒤로는 불을 뿜는 용 ‘드락’, 여성 용 ‘비브리아’, 황소 ‘보우’가 뒤따랐다.

악마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안나 씨는 “코레포크는 두려움을 다스리는 집단 훈련이며 안전을 위해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며 “불은 위험하지만 우리가 통제하고 공유하면서 신뢰를 쌓는다”고 말했다.

플라사 데 라 폰트 광장에선 아이들이 만들어 가는 ‘산타 테클라 페티타(작은 산타 테클라)’가 열렸다. 직접 만든 축소형 거인 인형과 소형 용이 등장하고 초등학생 악단이 전통 악기를 연주한다. 타라고나시교육청은 페티타를 공식 학습활동으로 인정하고 매년 전체 축제 예산의 7%를 지원한다. 2021년부터는 14~18세 청소년에게 축제 운영권 일부를 이양하는 청소년 기획단도 운영 중이다.

▲아이들이 만들어 가는 산타 테클라 페티타(작은 산타 테클라) 퍼레이드.

산타 테클라 축제의 운영 핵심은 ‘민속문화운영위원회(세르구치 포퓰라르)’다. 약 60개 단체가 모인 이 위원회는 1년 전부터 회의를 열어 프로그램을 설계한다. 전통공연, 인형극, 불놀이, 인간탑 등 분야별 분과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의사결정은 만장일치 합의제다. 

물론 불꽃, 소음, 쓰레기, 상업화 등 매년 같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밤새 소음에 잠을 못 잔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특히 2023년 폭죽 낙하 사고 이후 타라고나시는 축제안전 전담부서를 신설했다. 모든 불꽃 행사는 보험 가입이 의무화됐고 주요 행사장마다 응급의료 부스가 설치됐다. 

하지만 타라고나시는 이를 강압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축제 거버넌스 회의를 열고 주민대표, 상인회, 시청이 함께 모여 개선안을 합의한다. 올해는 다회용 컵 보증금제, 여성·청소년 안심부스, 소음 가이드라인 개정이 새로 도입됐다.

타라고나시에 따르면 올해 축제 투입 비용은 약 10억 원이다. 축제를 통한 직·간접 경제효과는 100억원(약 600만 유로)으로 추정했다. 축제 기간 호텔 점유율은 90% 이상 달하고 2000여 명이 축제 현장에서 일하고 봉사한다. 

숫자보다 중요한 건 ‘체류형 전환’이다. 낮에는 성녀 행렬, 오후에는 인간탑과 가족 프로그램, 밤에는 코레포크와 미식 행사 등 시간대별로 다른 프로그램을 배치해 방문객이 하루 이상 머물도록 설계했다. 

또한 대성당과 주요 광장을 축으로 하고 골목과 주변부에 분산 무대를 배치해 상권을 도시 전역으로 확장했다. 매년 디자인을 바꾸는 기념품은 조기 품절되고 지역 식당들은 특별 메뉴로 매출을 올린다.

산타 테클라 축제는 전통을 지키되 혁신을 멈추지 않고 있다. 중세 의례와 도시 퍼레이드의 골격은 유지하면서 주변 콘텐츠는 해마다 실험한다. 올해는 친환경 컵, LED 조명, AR 체험관이 새로 등장했다. 또한 1979년 민주 지방정부 출범 이후 시민들은 잊힌 의식무용과 전설 속 동물 모형 행렬을 복원했다. 이러한 가운데 2010년 인간탑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공동취재단
해남신문 노영수 기자, 남해시대 전병권 기자, 담양곡성타임스 김고은 기자, 한산신문 박초여름 기자, 홍주신문 한기원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