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을 닮은 사람들

김성률 (해남고 교사)

2025-11-10     해남신문

달마산에서 나는 여전히 소년이다. 소년기 코흘리개 모습으로 떠났다가 상당한 시간이 흘러 다시 돌아와 살면서도 산 앞에서는 여전히 그 코흘리개 적 어설픈 모습이다. 산의 나이에 비하기엔 인간은 얼마나 작고 초라한가? 

어설픈 모습으로 치면 11월이 그런 시간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가장 아름다운 색깔을 가진 시간인데도 조금은 부족하고 어설프다. 한가한 시기라는 생각이 드는 열두 달 중 가장 관심받지 못하는 계절. 그래서일까, 11월은 온전한 가을이면서 그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뭐라고 하기에도 참 애매한 달이다. 그래서 한 시인은 11월을 낀 달이라 했다. 10월과 12월에게 메인 행사를 다 뺏기고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그런….

그런데 난 11월을 닮은 사람이 좋다. 어깨가 번쩍이진 않지만 처지지 않고 웃음과 울음도 넉넉해 누구나 어디서나 어울리는 달마산 아래 고향마을 형님 같은. 이 양반은 내세워도 나서지 않지만 몸이라도 보태야 할 자리엔 어김없이 있는 사람이다.(11월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온전한 한 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 번도 그것을 내세우지 않는다. 늘 부족한 사람이라고 너털웃음을 짓고 뒤로 물러선다. 사람들은 이 양반을 곱게 물들었다고 한다. 나는 이 양반을 볼 적마다 11월의 커다란 단풍나무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 산 아래 늘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사는 또 다른 사람도 있다. 누가 봐도 잘못한 게 없는데 자신을 살피고서 없는 잘못을 지어낸다. 그러지 말라는 데도 자신이 못난 탓이라고 미안해 한다. 지켜보는 사람을 오히려 미안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주변에 미안하다는 말이 프로그램돼 있지 않은 몇 사람이 있다. 뭐 잘나서 그러겠거니 생각한다. 그는 10월이나 12월처럼 다들 어디 관광이라도 가고 나면 혼자일 때가 많은데 외로움마저 허풍이 들어가 늘 자신만만한 척한다. 짠하다. 홀로 잘나서 짠한 사람, 그는 산에 들어서도 바다에서의 무용담으로 지칠 줄 모른다. 바다에 가면 또 산에서의 무용담을 펼칠 것이다. 누가 자랑이라도 할라치면 자신의 자랑을 펼치고 누가 슬퍼하면 다른 자리에 있듯 한다. 그는 늘 잘났고 무리 중엔 으뜸임을 내세운다. 그는 벗의 슬픔을 부여잡고 울지 못한다. 그의 삶에 미처 저장하지 못한 ‘공감’을 그가 알 날이 있을까? 그는 11월을 살아보았을까, 생각은 해 보았을까? 

난 슬픔을 안고 슬픔에게 말을 걸어주는 그런 사람이 좋다. 내 슬픔을 한가득 품고 왔을 때 달마산이 그랬다. 달마산을 닮은 그 형님이 그랬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안아준 사람, 이 양반은 정말 11월을 빼다 박았다.

11월은 그렇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어 소개하기도 애매하다. 우리 주변의 거시기나 머시기들처럼 자기소개 겸 인사를 하라 하면 ‘아, 뭐라 하지?’ 긁적이다가 배시시 웃고 마는, 그렇다고 흠이 될만한 것은 더더구나 없는, 비싸지는 않지만 남 줄 수도 없는 그냥 아까운 물건 같다고나 할까? 

11월 같은 친구와 별을 보고 싶은 계절이다. 조금 쌀쌀한 듯하지만 그렇다고 들어가고 싶지 않은 별이 쏟아지는 밤, 탁배기 한 잔 놓고도 오랜 시간을 거슬러 갔다가 남은 날들을 설계하며 별이 많은 세상을 그려볼 수 있는 친구, 뭐 거창한 얘기는 하나 없어도 좋은 시간이었노라고 기억할 수 있는 11월을 닮은, 그리하여 따뜻해진 체온으로 가을의 한 조각으로 남는, 친구여, 그대가 보고 싶다.

그대가 오지 않아도 나는 그대에게 가고 있다는 한 시인의 말이 아니어도 네가 오지 않아도 내가 가겠다는 11월의 마음으로, 나를 낮춰 너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아! 너는 산의 저편에서 오고 나는 이편에서 가서는 작고 어설프게라도 기어이 만나고 말자. 11월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