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정의, 거리에서 다시 묻다
정주아 (환경교육사)
‘기후정의로 광장을 잇자’를 기치로 한 ‘927 기후정의행진’이 지난 9월 2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동십자각 광장에서 열렸다. 653개 환경·노동·종교 단체 활동가와 시민 등 3만여 명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직접 제작한 손팻말과 현수막을 든 참가자들은 사전 행사와 본집회를 마친 뒤 종로 일대를 1시간가량 행진했다.
이번 행진에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전환 계획 수립’, ‘탈핵·탈화석연료, 공공 재생에너지 확대’, ‘대기업 중심의 성장 산업 재검토와 생태계 파괴 사업 중단’ 등 6가지 요구안이 제시됐고 이를 가로막는 ‘기후정의 걸림돌’도 함께 발표됐다.
나는 작년에도 이 행진에 참여했지만 올해의 광화문은 조금 달랐다. 거리에는 환경단체뿐 아니라 청소년, 장애인, 여성, 노동자, 농민, 예술인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의 삶터에서 마주한 위기의 결이 달랐지만 외침은 하나였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북극곰 이야기’가 아니다. 폭염과 폭우, 가뭄, 태풍이 우리 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 농사는 계절의 리듬을 잃었고 폭우 한 번이면 마을의 길이 끊긴다. 어르신들은 한여름에도 냉방비 걱정에 선풍기 바람만 쐰다. 그 피해는 언제나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먼저 닿는다. 그래서 ‘기후정의’는 단순히 환경문제가 아니라 불평등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의’란 누군가를 처벌하자는 말이 아니다. 더 이상 누군가의 희생 위에 다른 이의 편리함이 세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대도시의 전력 소비를 위해 지역의 산이 깎이고 저탄소 농업을 위해 농민이 감당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나며 돌봄의 부담이 여성에게 집중되는 현실 속에서 ‘탄소중립’이라는 구호만으로는 미래를 바꿀 수 없다.
피해는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그리고 가장 깊게 닿는다. 폭염 속에서 거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쉴 그늘 하나 찾기 어렵고 냉방비를 감당하기 힘든 노년층은 더위에 그대로 노출된다. 도시의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교통 정책은 오히려 대중교통 소외지역 주민들의 이동권을 제약하기도 한다. 태양광과 풍력발전소가 ‘친환경’이라는 이름 아래 마을 공동체와 산림을 잠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기후대응’을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기후정의는 결국, 누가 비용을 내고 누가 혜택을 얻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행진을 하며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우리가 이렇게 외쳐도 세상은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무력감과 ‘그래도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외쳤다. “기후위기를 멈출 권리를 우리에게 달라!”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부끄러워졌다. 어른으로서, 기성세대로서 무엇을 물려주고 있는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익숙해짐’이다. 뉴스 속 폭염 사망자 통계, 폭우로 잠긴 도시의 모습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점점 둔감해진다. ‘나 하나 바꾼다고 달라질까’라는 체념이 행동을 멈추게 만든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바뀌지 않는다.
나는 해남에서 지역의 환경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플로깅, 자원순환 체험, 수리수선 등 작고 느린 실천들이다. 하지만 이 모든 행동은 결국 ‘정의로운 전환’을 향한 발걸음이라 믿는다. 지역에서부터 에너지 절약과 녹색소비, 자원순환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은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지키는 일이다.
광화문 행진이 끝난 뒤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는 지역으로, 누군가는 학교와 일터로 돌아가 각자의 자리에서 싸움을 이어간다. 기후정의는 거대한 슬로건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실천이다.
‘기후위기에 익숙해지지 않기’. 그것이 올해 행진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건 다짐이었다.
우리가 익숙해질수록 위기는 더 깊어진다. 그래서 나는 내년에도, 다시 그 길 위에 설 것이다. 기후정의는 언젠가 이 길의 끝에서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