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바위가 내려다보는 교육의 고장, 북평면 ‘금산마을’
마을 뒤 달마산·도솔암·부처바위 등 북평면 대표 서당 ‘금산재’ 위치해 500년 수령 느티나무서 도제 추억
북평면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의사와 공무원 등을 다수 배출했던 곳이 있다. 달마산 자락 남쪽에 위치한 금산마을에는 지난 1860년 석계 백종식 훈장이 ‘금산별업’이라는 서당을 여는 등 예로부터 유교사상이 깊고 학구열이 높은 고장이었다. 마을 뒤편 달마산에 위치한 부처바위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애를 낳지 못하거나 소원 성취를 빌기 위한 사람들이 마을을 찾기도 한다.
북평면 금산마을은 과거에는 바위에 샘이 있다해 ‘암정’이라고 불렸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옥녀가 거문고를 타고 노는 형상이라며 거문고 금(琴) 자를 써 ‘금산(琴山)’이 됐다. 현재 17세대 3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아담한 마을로, 도솔암 주지 법조 스님도 이곳의 일원이다. 주로 벼와 마늘, 배추, 보리 등을 재배 중으로 마을은 작지만 주민 모두가 가족처럼 화합하며 지내고 있다.
특히 석계 백종식 훈장이 개설하고 아들인 우계 백치신 선생과 조카 백효민 선생이 대를 이은 ‘금산별업(금산재)’은 북평 지역에서 알아주는 서당이었고 완도와 송지, 옥천 등에서도 학생들이 찾았다. 백종식 훈장과 대를 이은 선생들이 한학뿐 아니라 한의학에도 통달해 한약방을 운영하며 한의학도 가르쳤다. 이곳에서 배운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못 잊어 모사계를 조직해 운영했고, 다른 지역으로 가 서당훈장이나 한의사가 되기도 했다.
마을주민 문화식(80) 씨는 “17살부터 20대 중반까지 이곳 서당에서 천자문과 맹자, 동의보감 등을 배웠는데 주민들은 대부분 한약방 또는 영사제라고 불렀다”며 “주민이 아플 때는 건강 지킴이 역할도 하고 마을에 훈장님의 덕과 사적을 기리는 비가 있을 정도다”고 말했다.
금산마을 뒤로는 도솔암과 달마산, 부처바위 등이 있는데 주민들에게는 어릴 적 놀이터이자 사랑이 싹트던 데이트 장소였다. 달마산 너머 송지면 마봉리의 청춘남녀들과 눈이 맞아 결혼을 하고 사돈을 맺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김성진(70) 씨는 “어릴 때부터 새벽이면 집안의 소중한 자산이었던 소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달마산 자락을 오르고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용샘도 자주 놀러다녔다”며 “집집마다 소 먹이 주는 당번이 새벽부터 오후 3시께까지 소를 지켜야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옆동네 사람들도 많이 마주치고 어울렸다”고 말했다.
김갑주(66) 씨는 “공직 생활을 하다 2019년에 고향인 금산마을로 귀촌했는데 마을이 조용하고 우애가 넘친다”며 “부처바위 뒤쪽의 바랑(승려들이 메고 다니는 주머니) 부분을 조림 사업을 통해 나무로 가렸더니 마을의 시끄러운 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있다”고 말했다.
약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도 마을의 자랑거리다. 지금은 주민들이 줄어들고 고령화돼 지내고 있지 않지만 지난 2010년까지 정월 초하루 음력 1월 1일이면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도제’를 지냈다.
부말례(65) 부녀회장은 “도제를 지내기 보름 전 쯤 나무에 금줄을 치고 했던 기억도 나고 도제 이후 음식을 같이 나눠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특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 느티나무 잎이 싹트는 시기로 모내기 시기를 정하고 그 형세로 풍년을 점쳤다”고 말했다.
김성진 씨는 “70년대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선풍기도 없던 시절이라 느티나무 아래가 마을 주민들의 여름 피서지였다”며 “늦게 가면 자리도 없을 정도로 주민들의 사랑방이었는데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금산마을도 다른 농촌지역 마을처럼 고령화와 인구 소멸의 위기를 겪고 있다. 지난 2023년부터 이장을 맡고 있는 이경희 씨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마을을 더 널리 알리고 에너지를 불어 넣고 싶다고 전했다.
이경희(62) 이장은 “마을에 정이 넘치고 가족적인 분위기는 너무 좋지만 주민들의 평균 연령이 70대 후반일 정도로 고령화돼 있고 영농활동 등으로 인해 행사나 마을 사업을 추진할 인원을 모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풍광이 뛰어나고 터가 좋아 입주하고 싶다는 문의가 연이어 들어오는데 빈집을 정리할 수 없어 새로운 사람을 받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타지에 있는 유족들과 합의 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며 마을의 유산과 보물들을 지켜나가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