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을수록 바위처럼 더 단단하게, 마산면 ‘고암마을’
한때 군내 가장 작은 마을로 조사 통폐합 위기서 도·군 으뜸마을까지 할미바위 오가는 맨발걷기길 조성
지난 2008년 마을 주민이 17명에 불과해 해남군에서 가장 작은 마을로 꼽히고 통폐합 위기에 처했지만 오히려 한 가족처럼 서로 의지하며 의기투합한 작지만 강한 마을이 있다. 마산면 육일시에서 북쪽으로 1㎞ 가량 도로를 따라가면 도착하는 고암마을이 그곳이다.
마산면 고암마을은 올해 으뜸마을 3년차로 14가구 20여 명의 주민들이 쌀과 고구마, 절임배추 등을 생산하는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산골마을이다. 과거 맹 씨와 서 씨 등이 집성촌을 이뤘고 사람은 적어도 넓은 농토를 보유해 부촌으로 꼽히기도 했다.
마을주민 맹철웅(63) 씨는 “예전 영산강 하구둑을 막기 전에는 산 너머 바닷가까지 걸어가 물놀이도 하고 낙지를 비롯한 각종 해산물을 잡았던 기억이 있다”며 “80년대 후반에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교통이 좋지 못했는데 길이 생기며 마을이 많이 발전했다”고 말했다.
윤종하(75) 씨도 “80년대 초반에 막 결혼하고 저녁에 택시를 타고 마을에 와서 내렸더니 택시 기사가 길이 무서워서 어떻게 가냐고 되묻기도 했다”며 “비포장도로에 길이 좋지 못해 정말 외진 곳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좋아졌다”고 말했다.
마을 이름인 ‘고암(故岩)’은 해남군 문화유산이자 지석묘 1270호로 지정된 마을 뒷산의 할미바위에서 유래됐다. 또 마을 앞 밭에도 작은 바위가 있어 이를 ‘할아버지 바위’라고 불렀는데 이 바위에 올라가 할머니를 외치면 할미바위에서 숟가락으로 솥을 긁는 소리가 났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주민 맹철환(65) 씨는 “바위 폭이 6~7미터에, 높이가 3~4미터에 이를 정도로 엄청 큰 바위인데도 어렸을 때 놀 것이 별로 없어 바위 옆 나무를 타고 바위에 올라갔다가 아버지에게 혼났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할아버지 바위는 있었다고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현재는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손미숙(66) 노인회장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동료가 해남에 살았는데 이곳 고암마을이 마음에 들어 귀촌한지 어느덧 18년이 돼 간다”며 “마을 어르신들이 할미바위에 가서 기도를 하면 일이 잘 풀린다해 막걸리를 가지고 가 빌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때 할미바위는 대나무와 각종 풀이 우거져 찾기 어려울 정도로 방치된 공간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맹영분 이장이 지난해 으뜸마을 사업을 통해 대나무숲을 정리하고 할미바위를 오가는 황토 맨발산책길과 꽃밭을 조성했다.
맹영분(68) 이장은 “이곳 마을에서 나고 자랐지만 직장생활을 서울에서 하다 지난 2018년 고향인 고암마을로 돌아왔다”며 “마을의 보물인 할미바위가 대나무 때문에 갈 수 없는 곳이 된게 아쉬워 포크레인 작업 등을 통해 맨발 황토길을 만들었는데 산불 차단 공간도 되고 조성하는 동안 공동체가 더 활성화됐다”고 말했다.
황토 맨발 산책길과 마을 앞 조경 등을 통해 고암마을은 전남도 으뜸마을과 군 으뜸마을로 선정돼 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해남군 사회적공동체 한마당에서 맹영분 이장이 고암마을의 우수사례를 발표하며 큰 박수를 받았다.
고암마을에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다수 존재했고 과거 제주도에서 산 말을 가지고 지나가던 길과 나주목사가 쉬어가던 와터 등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 앞 산 이름이 ‘역마산’일 정도로 말과 관계가 깊다.
맹 이장은 “마을 산자락에 고인돌들이 모여 있었는데 농어촌공사에서 농수로 공사를 한다며 이를 훼손하고 돌을 가져가 버리는 일이 발생해 이를 알리고 원상복구를 요청했었다”며 “이후로 군에서 유적지 조사도 하고 했는데 청동기 시대 무덤 등이 발견됐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마을이 작지만 부유하고 단란한 마을이었는데 못 살고 침체된 마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새롭게 발전해 이장으로서 굉장히 보람된다”고 덧붙였다.
마을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며 화합을 도모하고 있는 고암마을의 앞길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